[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9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96. 道伴 청담스님

성철 스님은 괄괄한 성정 탓인지 가까운 도반(道伴.구도행의 동반자)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대신 몇몇 도반들과는 무척 허물없이 지냈고, 그 중에서도 청담(靑潭)스님과는 더욱 그랬다. 성철 스님이 출가시킨 청담 스님의 딸, 묘엄(妙嚴)스님이 직접 성철 스님으로부터 들은 첫마디가 "청담 스님하고 나하고는 물을 부어도 안새는 사이"였을 정도니까.

두 스님은 1941년 가을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처음 만났다. 2년후 속리산 법주사 부속 복천암에서 하안거를 같이 나면서 도반의 우의를 다졌고, 그와 함께 한국불교의 개혁에 대한 의지도 키웠다. 당시 두 스님이 내린 결론은 '한국불교의 살 길은 선불교를 중심으로 한 수행가풍을 세우는 것'이었다.

두 스님은 역할을 적절히 나눴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방법'을 새로 만들어내는 데 전념했고, 청담 스님은 보다 현실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된 기능(수행과 교육)을 모두 갖춘 총림(叢林)건설'에 매진했던 것이다.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다. 청담 스님은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건설하고자 갔는데 대처승(帶妻僧.결혼한 승려)의 반발이 만만찮았다.

일제시대 풍습에 따라 결혼한 대처승 신분으로 해인사를 차지하고 있던 스님들이 절을 내놓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성철 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도 전쟁으로 해체되어야 했다.

그러나 두 스님의 결심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대구 파계사 부속 성전암에 칩거하며서 '수행자로서의 전범'을 몸소 실천했고, 그동안에도 청담 스님은 불교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0년대 초 청담 스님은 서울 우이동 도선사에 머물며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성철 스님이 도선사를 찾은 것은 1964년 겨울이었다. 두 스님이 만났으니 일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도선사에 도착한 성철 스님은 도선사가 여전히 일제시대 사찰의 모습, 즉 불상이 무속신앙의 대상들과 나란히 법당에 모셔진 것을 보았다. 그래서 청담 스님께 제안했다.

"청담 스님이 머물고 있는 절인데 이래서야 되겠나. 우리 옛날 봉암사 결사 정신으로 돌아가 법당 정리부터 해야제."

청담 스님이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우리가, 그래야제."

그리고는 법당에 모셔져 있던 칠성탱화와 산신탱화, 용왕탱화 등을 뜯어내 마당으로 집어던진 다음에 불살라 버렸다. 난리가 났다.

신도들이 "웬 중 둘이 도선사에 들어오더니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탱화들을 모두 태웠다"며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했다. 두 스님의 대답은 한결 같다.'비불교(非佛敎)',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수십년간 산신과 용왕을 믿어온 신도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 뒤로 한 3년 동안 신도가 끊어진 거라. 청담 스님이 불사(佛事)하는데 무지 고생했제"라고 말하곤 했다.

청담 스님이 성철 스님보다 세속 나이로 10살이나 많았지만 두 스님은 워낙 허물없이 지냈는데, 청담 스님의 제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청담 스님의 제자인 현성(玄腥)스님의 기억이 그렇다.

"성철 스님께서 도선사에 오신 후부터 청담 스님의 방에선 두 분의 대화가 쩌렁쩌렁 울렸고, 간간이 박장대소가 도량을 휘몰아치곤 했지요. 이전까지 항상 참선으로 적요만 흐르던 스님의 방이었는데, 뭐가 그리 재미있단 말인지. 나는 그 무렵 성철 스님에게 불만이 생겼어요. 은사이신 청담 스님이 훨씬 연상인데도 두 분은 '너, 나'하면서 서로 하대하는 거예요. 그 점이 이해가 안 갔지요."

그래서 현성 스님은 어느 날 청담 스님께 볼멘소리로 항의를 했다.

"속세 같으면 청담 스님이 큰형님뻘이잖습니까? 그런데 저 스님(성철)은 예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청담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의 보물이야!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느냐.너는 그따위 생각일랑 버리고,시봉이나 잘 하거라."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