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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오늘이 역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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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자 지음, 현암사, 176쪽, 8000원

역사학자 정옥자(사진) 교수를 만나본 사람들은 흔히 자그마한 체구와 부드러운 외모 속에 숨겨진‘강단’에 놀라곤 한다. 그‘강단’은 ‘최초’라는 수식어로 연결된다. 서울대 국사학과의 유일한 여교수. 규장각 관장을 맡은 최초의 여교수 등.

선인의 발자취를 따라간 전작과는 달리 신간은 국내 대표적 여성 역사학자가 회고한‘개인의 역사’를함께 담고 있어 흥미롭다. 그것은 역사적· 개인적 시련 속에서 한 여성이 어떻게 스스로를 단련시켜 갔는지를 보여주는‘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는 참혹했다. 아버지는 두 살배기 갓난애를 품에 안고,네 살,여섯 살 딸을 어깻죽지에 매단 채 어른 키로 스물 네길 넘는 호수 한가운데 몸을 던졌다. 어머니는 배에 남아 계집애의 분홍 치맛자락만 눈길로 붙들 수 있었다.”

강원도 춘천에서 유복한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 정 교수에게 한국전쟁은 잊을 수 없는 평생의 상처로 남아 있다. 꼬까옷을 입고 마치‘소풍을 떠나듯’나선 피난길은 결국 아버지와 세 동생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엄마도 떼어놓고 뛰어야 했던 아홉살 소녀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의미했고, 이후‘삶이 곧 죽음’이라는 생사관을 갖게 했다.

대학 졸업 후 10년만에 우여곡절 끝에 ‘아줌마 대학원생’이 된 뒤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여성 역사학자가 낯선 상황에서 일계(一溪) 김철준 선생은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대학 강사라도 하며 좀 재보려고 그러나?”라고 물었다. 이 국사학계 거두의‘시험’에 그는 “염불만 하고 잿밥은 탐하지 않겠습니다”고 답해야 했다. 다른 욕심 부리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세 아이를 억지로 무릎에서 떼어놓으며 공부에 매달리는‘모진 어머니’가 돼야 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우리 역사와 선인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 있었다. 특히 평생 학문적 정열을 바쳐온 정조와 규장각에 대한 묘사에선 절절함마저 묻어난다.
“해진 무명 옷으로 철을 나고, 찬은 세가지를 넘지 않은 왕은 뒤주에 갇혀 죽은 아비의 기억으로 새벽 닭이 울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조선 문화의 태평성대를 이루어낸 정조에게 규장각은 진경문화의 절정이자, 슬픔을 문(文)으로 침잠한 삶의 안식처였다.”

늘 한쪽 눈은 과거에, 다른 쪽 눈은 오늘에 두고 사는 역사학자로서 그는 연암 박지원이 말한‘법고창신’(法古創新·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한다)을 역설한다.‘옛 것을 통해 새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개념이다. 그것은 아는 데서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옮길 때라야 가치가 있다는‘역사가 오늘의 지식인들에 보내는 메시지’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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