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컴백 가수 오승근 "오랜 방황 끝 길 찾은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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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난 2월 중순 가수 태진아의 집. 평소 가족처럼 지내는 태진아씨 부부와 오승근.김자옥 부부가 저녁식사를 하던 중 김자옥씨가 별렀던 말을 꺼냈다.

"태진아씨, 우리 남편 노래 잘 하지? 다시 가수 하는 거 보고 싶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태진아가 결정적인 말을 던졌다.

"형, 내가 히트치려고 받아놓은 곡이 있는데, 한번 해보실려우? 공주(김자옥의 별칭)가 저렇게 원하는데."

"여보, 내가 고속도로 나가서라도 판 팔게, 응?"

17년 만의 컴백은 이렇게 이뤄졌다.

'비둘기 집''처녀 뱃사공''봄날은 간다'….

1980년대 초 감미로운 목소리로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황금 듀오 '금과 은'의 오승근씨가 새 앨범을 들고 팬들을 찾아 왔다.

김자옥과의 결혼과 동시에 가수 활동을 접고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사업에만 매진해 왔던 오승근에게 노래를 되찾아 준 1등 공신은 김자옥이다. 집요한 '베갯머리 로비'가 주효했던 것이다. 설득만으로 부족해 그녀는 아예 타이틀곡 '있을 때 잘해'의 코러스까지 맡았다.

"이 사람 사업하면서 웃는 것 한번도 못 봤어요. 늘 얼굴이 굳어 있었죠. 그런데 요즘엔 얼마나 표정이 밝아졌는지 몰라요.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인터뷰 중에도 김자옥은 특유의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연신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화제를 뿌리며 오승근과 재혼했을 때 김자옥은 남편이 즐겁고 자신감있게 살아줬으면 하는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은 남편의 체질이 아닌 것 같았다. 다정다감하던 남편은 일에 치이면서 매사에 무심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96년 김자옥이 TV 코미디 프로를 통해 전국적으로 '공주병'신드롬을 불러 일으켰을 때였다. 어느날 밤 오승근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주변에서 공주 공주 하는데 대체 '공주'가 뭐요?"

하지만 오승근은 가족 야유회라도 가면 너무나 즐거운 표정으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런 그를 보며 김자옥은 어떻게 하든 남편이 다시 노래를 부르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업이 암초에 부닥치자, 김자옥은 본격적으로 설득 작전에 들어갔다. 오승근도 결국 그 뜻을 받아들였다. 여기엔 제작자로 나선 태진아의 도움도 컸다.

큰 맘 먹고 다시 서는 무대지만, 쉽지는 않을 터. 오승근은 처음엔 목소리가 안 나와 고전했지만 이제 조금씩 옛 감각이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1남1녀)의 든든한 후원으로 마음까지 편안하니, 노래가 더 잘 된다고 했다.

"긴 터널에서 방황하다 이제야 길을 찾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노래만 부르며 살 겁니다."

다행히 앨범이 출시된 지 한달도 안됐지만 반응이 좋다고 한다. 현철.송대관.태진아.설운도의 '트로트 4인방'에 버금가는 선주문 1만장이 들어온 것.

모처럼 가수로서 바빠진 오승근. "집에선 공주님 모시느라 쉽지 않으실텐데요…"했더니 옆에 있던 김자옥이 웃음을 터뜨린다.

"집에선 남편이 왕자예요. 전 털털한 성격이고, 남편은 얼마나 깔끔한데요."

어느덧 50줄에 접어선 두 사람. 가수로서의 성적보다는 가족의 정을 되찾아 기쁘다며 서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에너지로 충만한 청년기도 좋지만 멋진 중년 이후를 설계해 나가는 두 사람에게서 성숙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상복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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