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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션와이드] 농촌속 캠퍼스 탐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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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농촌에 들어선 대학이 농촌의 문화와 경제를 바꾸고 있다.

캠퍼스 주변의 논 ·밭에 PC방과 원룸 ·음식점 등이 들어서고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농민들은 대학에서 교양강좌를 듣고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도 한다.전북도내 9개 ‘농촌 대학’을 찾았다.

#농촌속 도시섬

호원대가 있는 전북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 일대는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농촌속의 도심이다.

캠퍼스가 들어서기 전인 1997년 이 일대는 논 ·밭농사를 짓는 전형적인 농촌이었다.아직도 캠퍼스에서 1㎞ 정도만 벗어 나면 콤바인이 누렇게 익은 벼를 베느라 굉음을 내며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호남평야를 휘젓고 다닌다.

이곳에 캠퍼스가 들어서자 인근 논밭에 원룸 아파트 ·PC방 ·노래방 등이 줄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젊은이들의 물결과 삽을 들고 논으로 향하는 농민들의 모습도 이젠 자연스럽다.자식들을 도심으로 내보내 쓸쓸하던 농민들은 자식같은 대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되면서 얼굴에 생기가 넘쳐났다.

농촌에 들어선 대학이 농심(農心)과 지역문화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도심같은 거리가 생기고 농민과 대학생 사시에 독특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등 농촌이 젊어지고 있다.

이런 ‘농촌지역 대학’은 전북도내에만 7곳이나 된다.군산시 성산면 도암리 군장대학이 94년 개교한데 이어 호원대학(97년)은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임실군 신평면 창인리에는 예원대학(2001년)이 들어섰다.

백제예술대학(92년)은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에,서남대(91년)는 남원시 광치동에,한일장신대(95년)는 완주군 상관면 신리에,벽성대학(95년)은 김제시 공덕면 공덕리에 각각 문을 열었다.

#농민,대학생과 어울리다

지난 9일 오후 3시 전북 완주군 백제예술대에서는 대학생 ·농민이 함께 어우러진 신명나는 춤판이 벌어졌다.신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춤을 배우는 농민들은 나이 탓인지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않아 힘들어 하는 모습이었다.그러나 마음만은 20대.

지난 5월 백제예술대 축제때 학생들이 농민들을 초청해 신세대 춤을 가르친 뒤 농민들의 호응이 좋자 아예 일주일에 한번씩 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주민 이복실(52)씨는 “TV에서나 보던 젊은이들의 춤을 배우다 보니 마음이 젊어지고 건강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10년전 백제예술대가 들어설 당시 농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농민들은 농삿일에 쫓겨 눈코뜰새 없는데 노랑머리를 한 남녀 대학생들이 찢어지 청바지에 기타를 메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등 영 마뜩찮았다.

이같은 상황은 농촌에 위치한 대학 구성원들이 해결해야 할 공동의 과제였다.농민들의 비난이 쏟아질 경우 대학발전에 많은 지장이 빚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학들은 학생들에게 옷차림·행동 등이 농민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학생들에게 자제를 당부하는 한편 농민들에게는 각종 문화공연을 열어 주고 농기계 ·가전제품 등도 수리도 무료로 해줬다.

백제예술대는 축제 때마다 농민들을 초청해 댄스경연대회 ·김치담그기 ·위안잔치 등 각종 행사를 열고 있다. 평소에도 주민들이 주관하는 수박축제 등 각종 행사에 축하공연단을 보내 농민들의 흥을 돋아준다. 제품포장 ·수공예 ·사교댄스 등의 강좌에 농민들을 초청하는 것은 물론이다.

주민 이성근(58)씨는 “주민을 위한 교양과목 수업시간표를 보고 필요한 강좌는 빠짐없이 듣는다”며 “이래서 우리지역 농민들의 교양수준은 아주 높은 편이다”고 말했다.

군산 군장대는 농기계 무료 수리는 물론 자동차와 농기계 관련강좌에도 농민들을 초청한다.

군산 호원대는 지난 8월 한달 동안 농촌 주부 1백50여명을 초청해 도자기 ·케익 ·생활용품 ·인테리어 소품 ·칵데일 만들기와 건강관리법 등의 강좌 실시했다.남원 서남대는 지난달 한달 동안 농민 40여명에게 컴퓨터 사용법 등의 강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김호영(54)씨는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으나 나이가 들어 학원에 다니는 것이 창피해 배우지 못하던 참에 대학에서 강좌를 마련해 줘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오지호(22 ·호원대 2년)씨는 “축제나 수업시간에 나이가 지긋한 농민들과 어울리려니까 처음엔 어색했는데 이젠 부모처럼 따른다”고 말했다.

#농촌마을 변화

대학가 주변 농촌은 원룸은 물론이고 PC방 ·호프집 등의 업소가 들어서 대도시 중심가 못지 않다.노령층이 많은 농촌에 젊음의 물결이 넘치는 것이다.

군산 호원대 주변의 경우 5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원룸이 28곳이나 된다.대학 정문 앞 길에는 노래방 ·PC방 ·호프집 등 업소 50여곳이 영업을 하고 있다.

완주 한일장신대 주변에는 최근 20층 규모의 임대아파트가 들어섰다.남원 서남대도 마찬가지로 원룸 ·대형 ·연립 등 대규모 숙박 시설이 30여곳이나 된다.

농사를 지어 소득을 올리는 농민들은 거의 없고 하숙 ·업소 운영 등이 주 수입원이 되었다.

호원대 주변에서 원룸을 운영하는 박모(59)씨는 매월 3백여만원의 순이익을 내고 있다.농사를 지을때 수입의 두 배다.백제예술대에서 호프집을 하는 강경철(49)씨도 밭농사때 보다 수입이 두 배 이상 늘었다.

땅값도 껑충뛰어 호원대 주변의 경우 평당 3만∼4만원하던 땅이 지금은 70여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군장대 강지호(품질안전관리과) 교수는 “농민들을 위한 각종 강좌를 열어 필요한 지식을 전해 주는 것도 지역을 위해 대학이 해야하고 보람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서형식 기자

*** 농민이 본 대학생

*** 농민이 본 대학생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색다른 문화를 접하니 젊어지는 기분입니다.대학생들과도 친해져 부모 자식 처럼 지냅니다.”

군산시 임피면 월하리 호원대 주변 서항마을 이장인 박양근(66)씨는 “젊음의 물결이 마을 전체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학이 들어설 당시 박씨는 대학생들의 튀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불만이 많았었다.학생들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지고,주민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남여 학생들이 껴안는 것을 볼때마다 속이 터져 잠까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행동이 요즘 사람들이 펼치는 젊음의 발산 방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돼 대학생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朴씨는 “대학 축제때 초청을 받아 캠퍼스에 가 보면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춤·놀이·노래 등 각종 문화를 경험하게 됐고 이들은 문화를 이해하게 됐다”고 자랑했다.

농삿일 밖에 모르던 농민들이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각종 문화를 즐기다 보니 마음이 젊어져 건강까지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또 “땅값이 오른 것은 물론 농민들이 각종 업소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은 점”이라며 “그러나 종전처럼 훈훈한 정을 나누는 모습은 사라지고 인정이 메마른 각박한 지역으로 변한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朴씨는 생활의 조건이 향상된 만큼 인정도 훈훈한 지역이 될 수 있도록 이장으로서 학교측과 협의해 방법을 찾을 생각이라고 밝혔다.

*** 대학생이 본 농민

“창작활동 아이디어를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농촌에서 얻죠.농민들의 후한 인심도 공부를 하는데 큰 도움이 돼요.”

완주 예원대 김서영(21 ·한국무용과 2년)씨는 농촌에 있는 대학에 의외로 좋은 점이 많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金씨는 “수업이 없는 날 산과 계곡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춤 연구에 몰두 할 수 있는 것은 농촌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며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따뜻한 마음에 이끌려 친 부모처럼 어울려 지내는 것도 큰 매력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농민들이 학생들에게 베푸는 만큼 학교나 학생들이 농민들에게 해 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농민들에게 나눠 주는 이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농민들을 위한 문화공연도 했으나 이는 농민이 주인공이 아닌 학생 위주의 행사였다는 점을 감안,앞으로는 농민이 직접 참여하는 행사를 많이 준비하고 있다는 계획도 털어 놓았다.

예컨대 풍물 ·판소리 등의 문화공연을 할 경우 반드시 농민이 배우고,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특히 농민들 사이에서 수백년 동안 이어 내려 오는 민속문화를 발굴하고,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작업도 농민들과 화합을 다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金씨는 “2년여 동안 농촌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농민들의 근검 ·절약 정신이 몸에 베어 친구들을 만나면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지만 기분은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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