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회담 '반테러'밖에 할얘기 없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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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金大中.DJ)대통령과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9일 청와대에서 가진 영수회담은 미국의 반(反)테러전쟁에 대한 초당적 협조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두 사람이 발표한 5개 항의 합의문도 이 의제에 국한됐다.

2조원 규모의 2차 추경예산안 편성 등 구체적인 민생.경제 대책은 '여.야.정(與.野.政) 정책협의회'로 넘겨졌다.

회담은 지난 1월에 이어 9개월 만에 열렸지만 수많은 정치현안은 덮어둬야 했다. 서로가 합의할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김무성(金武星) 총재 비서실장도 "다른 논의는 일절 없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오홍근(吳弘根)대변인과 한나라당 권철현(權哲賢)대변인은 이번 회담에 대해 "분위기가 좋았다"고만 했을 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당에 돌아온 李총재도 부총재.당직자 등에게 회담 내용만을 간단히 설명했다.

때문에 "그 정도의 합의문을 발표하기 위해 영수회담을 했느냐"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金대통령이 8월 15일에 제안하고 李총재가 9월 중순 영수회담을 역제의하기는 했지만 갈 길이 달랐다. 다만 金대통령으로서는 정국상황이 꼬일 대로 꼬여 이를 풀어나갈 계기가 필요했고, 李총재로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활동공간을 넓혀가는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막후 협상에서는 "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시작된 직후 영수회담을 개최하자"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李총재는 "회담을 통해 본격적인 여야 대화국면이 조성되는 것처럼 비춰질 경우 이용호 게이트 등으로 곤경에 빠진 DJ만 거들어주는 것"이라는 당내 비판에 직면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당직자는 설명했다. 이것이 회담의 의미가 축소된 배경이다.

金대통령도 회담에서 정치적 이슈를 다루기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밝혔다. "만일 李총재가 국정쇄신을 강력 요구할 경우 회담 모양새가 이상해질 것임을 고려해 아예 회담의 의미를 반테러를 위한 협력에 국한시킨 것"이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權대변인은 "이용호 게이트 등 각종 사건들을 성역 없는 수사 등을 통해 해결하는 것만이 앞으로 영수회담을 다시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밝혔다. DJ와 李총재의 재회동에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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