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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인 뉴스 <98> 태국의 오늘을 읽는 5개의 키워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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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태국을 일컬어 ‘미소의 나라’라고 부르는 건 들어보셨을 겁니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그네들의 친절이야말로 태국을 관광 대국으로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태국인들의 얼굴에서 그 온화한 미소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증오에 가득 찬 구호가 방콕 거리를 뒤덮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요.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태국의 현대 정치사를 간략히 돌아보면서 그 이유를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영준 기자

쿠데타

1932년 이후 탁신 총리 축출까지 19차례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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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막연히 ‘태국=쿠데타의 나라’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상당 부분 맞는 얘기지만 1980년대 이후엔 빈도가 크게 줄었다. 1932년 절대왕정 국가에서 입헌군주제로 거듭나는 시발점부터 청년 장교에 의한 쿠데타였다. 이후 왕정 복고를 노린 쿠데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는 목적의 쿠데타와 반(反)쿠데타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를 축출한 쿠데타까지 합해 모두 19차례의 군부 쿠데타가 태국에서 발생했다. 미수에 그친 것까지 합하면 쿠데타 횟수는 더욱 늘어난다. 그러다 1992년 유혈사태를 동반한 시민 봉기로 군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는 태국에서 더 이상 쿠데타가 설 땅이 없다는 관측이 유력했다. 2006년 탁신 총리의 외유 중에 일어난 쿠데타는 15년 만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 쿠데타는 군부와 왕실은 물론 시민들의 암묵적 지지 속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태국은 걷잡을 수 없는 정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민주화

‘피의 일요일’ ‘피의 수요일’ 1970년대 수백명 희생

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몇 차례의 비극이 발생했다. 탄마사트대 학생들에 의해 촉발된 73년의 10월 정변은 사상 처음으로 시민 봉기로 군부정권이 무너진 사례다. 이 과정에서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그로부터 3년 만인 76년 10월엔 ‘피의 수요일’ 사건이 일어난다. 베트남·크메르(현 캄보디아) 등 인접국에서 시작된 공산화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군부와 경찰, 우익 조직이 탄마사트대의 학생 시위를 급습해 300명이 숨졌다. 80년대는 프렘 틴술라논다 장군이 현직 육군참모총장직을 유지한 채 총리에 취임해 8년여를 통치했다. 그는 야당인 민주당을 내각에 끌어들이고 의회를 활성화하는 등 점진적인 민주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총리를 군 수뇌부에서 선출하고 상원의원을 선거가 아닌 임명직으로 하는 등 온전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프렘의 통치를 ‘절반의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88년 프렘이 물러난 뒤 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한 발 다가섰다. 군부에서 결정한 총리가 아닌, 총선에서 승리한 다수당의 당수가 비로소 총리직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위정자의 부패란 새로운 문제가 태국 민주화의 발목을 잡았다. 복수의 정당이 난립, 정당 간 이합집산을 통한 연립정권이 이어지면서 정치 지도자들이 각종 이권이 얽힌 정부 요직을 서로 나눠 먹는 관행이 정착됐다. 이 때문에 정치인들의 자질 문제를 지적하는 여론이 일어나 97년 개정 헌법에서 국회의원직의 자격 요건을 대학 졸업자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정치가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태국은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발상지가 돼 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탁신

농민 끌어안고 관료·군부 통제, 지배 엘리트 등 돌려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재임 시절 농민·서민층으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탁신을 전형적 포퓰리스트로 비판하는 평가도 있지만 탁신으로 말미암아 태국 농민과 빈곤층이 처음으로 정치 의식에 눈을 떴다는 평가도 있다. 사진은 조류 인플루엔자가 유행하던 2004년 양계 농민을 돕기 위한 캠페인에 참석해 앞치마를 두르고 태국산 닭과 달걀의 안전을 호소하는 모습. [방콕 AP=연합뉴스]

97년 개정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이 헌법에 따라 최초로 실시된 2001년 총선에서 통신 재벌 출신의 탁신이 압도적 지지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태국 정치의 근본 틀을 뒤흔든 풍운아였다.

탁신은 과감한 구조 개혁과 규제 완화 정책으로 외환위기의 굴레에 빠져 있던 태국 경제를 정상 궤도로 끌어올렸다. 국영기업 민영화와 적극적인 외자 유치로 재임 기간 중 연평균 7~9%의 고도성장을 이뤘다. 또한 공무원 정원 축소 등 행정 개혁으로 관료의 힘을 빼고 군부 인사와 예산을 통제했다. 총리 재량권을 늘려 확보한 예산으로 농촌에 무상에 가까운 의료와 무이자 융자 혜택을 제공,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농민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확보했다. 전통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했던 농민층이 탁신의 적극적 지지 계층이 됨으로써 태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실 정치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들은 탁신이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란 비판을 받는 빌미가 됐다.

탁신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그는 왕실, 군부, 지배 엘리트들의 담합구조를 깨고 태국 사회에 남아있는 전근대적 요소를 타파하려 한 개혁가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불교 교리에 기반한 덕치와 계층 간 융화를 중시하던 태국의 기존 가치관을 파괴하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란 평가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기존 지배 엘리트를 적으로 돌렸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자신이 소유한 태국 최대의 통신그룹 신그룹의 주식을 모두 싱가포르에 매각해 막대한 부를 챙긴 사실이 드러나자 탁신을 떠받치던 민심마저 등을 돌렸다. 2006년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군부 쿠데타가 아무런 저항 없이 푸미폰 국왕의 재가를 얻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다.

사법 권력

선거서 ‘탁신 정당’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해산 명령

2008년 11월에는 친탁신 시위와 반탁신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 푸미폰 태국 국왕 부처의 사진을 치켜든 반탁신 시위대(위 사진)와 탁신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친탁신 시위대. [방콕 AP=연합뉴스]

탁신 축출에 성공한 군부와 관료는 정치·사회 시스템을 탁신 이전으로 되돌렸다. 헌법을 개정해 하원의원 선거를 소선거구제에서 중선거구제로 되돌리고 상원 일부를 선거가 아닌 임명제로 복원시켰다. 새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헌법재판소에 정당 해산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탁신이 이끌던 타이락타이당이 해산되고 소속 당원 115명에 대한 선거 출마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탁신의 수족을 자른 가운데 실시된 2007년 선거에서도 여전히 탁신의 추종 세력이 주축이 된 국민의 힘(PPP)당이 제1당이 됐다. 그러자 이번엔 헌법재판소가 PPP에 대한 해산 명령을 내렸다. 대신 총선에서 패배한 민주당의 아피싯 웨차치와가 총리가 됐다. 사법부가 권력의 향방을 가름 짓는 중요 정치 행위자로 등장한 것이다.

‘붉은 셔츠’ 시위대가 반정부운동에 나선 데엔 선거 결과를 뒤엎은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한 반발이 작용하고 있다. 이 밖에 ‘붉은 셔츠’(친 탁신)와 ‘노란 셔츠’(반 탁신)의 대립에는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다. 중산층·부유층과 서민·농민층 간의 분열이란 계층 간 대립이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하지만 엘리트 계층 안에서도 분열이 있다. 조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왕실과 군부, 관료 연합체인 전통적 엘리트가 반탁신운동의 핵심이라면 시장경제와 경쟁 원리를 중시하는 자본가 중심의 신흥 엘리트 가운데 상당수는 탁신 옹호 세력이다. 또한 탁신의 출신지인 북부 지방과 여타 지방 간의 대립도 존재한다. 이 같은 다양한 갈등 요소로 인해 좀처럼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는 데 태국의 고민이 있다. 정치 불안이 계속되는 사이 태국의 경제와 국제신인도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국왕

혼란 때마다 판관 역할 푸미폰 국왕, 이번엔 침묵

영화 ‘왕과 나’의 주연 배우 율 브리너가 맡은 역은 라마 4세였다. 그는 영국인 가정교사를 두고 서양 문물에 개방적인 군주로 그려졌다. 현 국왕인 라마 9세, 즉 푸미폰 국왕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고 스위스에서 대학을 졸업한 친서방 군주다. 올해 재위 64년을 맞은 푸미폰 국왕은 국민의 절대적 존경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92년 쿠데타로 집권한 수친다 장군이 공약과 달리 군정 연장을 선언했다. ‘청백리 방콕 시장’으로 알려진 잠롱 스리무앙이 이에 맞서 반군부 시위의 선봉에 섰다. 사태는 진압군의 발포로 53명이 숨지는 유혈사태로 치달았다. 그러자 푸미폰 국왕이 수친다와 잠롱을 왕궁으로 불렀다. 이튿날 수친다는 군정 연장을 철회했고 잠롱은 시위 중단을 선언했다. 이처럼 푸미폰 국왕은 태국 정정이 혼란에 이를 때마다 판관 역할을 했다. 군부 쿠데타도 국왕의 재가가 없으면 반란으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올 들어 또다시 유혈 소요로 번진 태국 정국 혼란에 대해 푸미폰 국왕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2006년 반탁신 쿠데타를 재가한 적이 있어 국왕이 다시 나서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고령으로 인한 건강 이상설이 더 유력하다. 극한 대립을 중재할 수 있는 권위의 부재,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태국 정국의 향방을 점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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