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공정위 정책수술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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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경제장관들 사이의 화두(話頭)는 공정거래 제도다.

산업자원부 장관 : 30대 그룹 지정 제도 자체를 고칠 때가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기획예산처 장관 : 차세대이동통신사업 출연금을 냈다고 다른 사업에 대한 출자를 규제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공정거래위원장 : (출자규제를)탁 털어낼 테니까 의결권을 제한하는 쪽으로 가자. 단(30대 그룹)개수를 줄이는 일은 최소화하자.

지난달 22일 규제완화 방안을 논의한 경제장관들의 대화록이다. 경제장관들조차 공정위가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도 공정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기업들은 무슨 사업이든 마음대로 벌일 수 있는데도 국내 대기업들은 30대 그룹 규제에 묶여 쉽사리 새 사업을 벌이거나 덩치를 키울 수 없다. 심지어 이동통신 출연금은 정부에 낸 일종의 기부금인데도 공정위는 이를 '출자' 로 간주하고 있다.

위의 사례는 최근 공정위에 쏟아지는 많은 비판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제 덩치가 크다고 기업행위를 규제할 때는 지났다. 사외이사제도 등을 통해 기업 지배구조를 제대로 짜고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이게 안됐다고 규제를 풀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 (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장)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아예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만들기로 했다. 공정위가 지나친 규제로 기업활동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쟁촉진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전념해야 할 '시장 파수꾼' 이 규제와 권력을 휘두르는 '기업 검찰' 인 줄로 착각하고 있다. " (A그룹 임원)

서울고등법원은 공정위가 계열사를 부당 지원(내부거래)한 기업에 과징금을 매기는 것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지난달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2년 이하 징역이나 1억5천만원 이하 벌금을 매길 수 있는 조항이 공정거래법에 있는데도 별도 과징금 조항에 따라 수십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처벌' 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잦은 조사 때문에 피해가 크다고 주장한다. 국세청 세무조사는 잦아도 5년에 한번 정도인데, 현대자동차.삼성생명.SK 등 4대 그룹 주요 계열사는 1998년 이후 3년 사이 벌써 서너차례의 부당내부거래 조사를 받았다.

공정위 조사 결과에 대한 행정소송도 급증했다. 공정위가 설립된 뒤 20년 동안 제기된 행정소송 2백건 가운데 68%(1백36건)가 98년 이후 제기됐다. B그룹 임원은 "무리한 법 집행으로 기업.정부간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 이라고 지적했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경쟁을 촉진하는 인프라가 돼야 할 공정위가 경제력집중 억제에 치우친 나머지 지금은 철저한 '규제위원회' 가 되었다" 면서 "디지털경제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추세에 맞춰 공정거래정책을 시급히 새로 짜야 한다" 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김영욱 전문위원.송상훈.이상렬.서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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