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고 왕따 되고…꼭두가 꼭 제 모습 같았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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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울 대학로의 랜드마크 동숭아트센터에 꼭두박물관이 들어섰다. 김옥랑(58) 동숭아트센터 대표가 수십 년간 모아 온 상여꼭두를 보여 주는 박물관이다. 우리의 전통 상여에는 나무로 깎은 인물·용·봉황 등이 있었다. 이름 없는 개인들이 시녀부터 재인, 호위 무사, 선비 등 온갖 종류의 인물형을 깎고 색칠해 상여에 부착했다. 꼭두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고 지켜 주고 즐겁게 해 주는 임무를 맡았다. 벼슬아치보다는 평민의 상여에 꼭두가 더 많이 쓰였다. 신분 때문에 살아생전 누리지 못한 것들, 저승길에선 마음껏 누리라는 뜻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무덤 부장품은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이렇게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매개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김 대표는 부잣집 딸로 태어나 재벌에 시집간, 겉보기엔 팔자 좋은 사모님이었다. 지난해 작고한 승상배 동화홀딩스 총회장이 남편이다. 그러나 김 대표는 “내가 정말 행복했다면 꼭두가 안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정아버님이 고 2때 돌아가시고 결혼을 일찍 했어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꼭두를 봤어요. 청계천 8가나 5가에 고물상 아저씨들이 온갖 잡동사니를 갖다 붓는 데가 있었죠. 얘들은 아무도 안 주워 가 구석에 버려진 채 있었어요. 버려지고, 왕따 되고, 홀로 있고…. 꼭 제 모습 같았어요. 남편은 사업에 바빴고, 내 존재는 보이지 않았죠. 친구를 만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남편 레벨의 사모님과 어울릴 수도 없었고….”

전처와 사별한, 아버지뻘 되는 남편이었다. 그녀는 전처의 소생들보다 나이 어린 새색시였다. 김 대표는 1945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52년생이다. 결혼 당시 남편과 서른 살 넘는 나이 차가 부담스러워 일곱 살이나 올렸던 게다.

“친정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모든 게 흔들렸죠. 유형의 것이 다 없어지는구나. 무형적 가치를 유형화하는 건 없을까….”

그래서 무형의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쪽 세계에선 또 ‘왜 사모님이 와서 일하시나’라며 곱지 않게 봤다. 무대 감독을 하고 싶어 하던 그녀에게 ‘스폰서나 하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래서 남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아무도 하지 않던 ‘꼭두극’에 뛰어들었다. 인형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어서 우리 고유의 말인 꼭두를 택했다. 84년 꼭두극단 ‘남남’을 창단하고, 이듬해 계간 ‘꼭두극’을 발행했다.

1 색시. 조선 초기, 높이 30.3㎝. 무늬 없는 홍포에 청색 띠를 매고 연지·곤지를 찍었다. 순박한 얼굴에서 한국인의 소박한 미의식이 엿보인다. 김옥랑 대표는 수집 초기에 순박한 꼭두를 주로 모았다.2 젊은 여인. 조선 후기, 높이 21.5㎝. 두 손으로 공손히 그릇을 받쳐 들고 있다. 이를 모티브로 삼아 옥랑 희곡상 트로피를 제작했다. 상을 주는 입장이지만 다소곳하게, 조촐한 모성의 힘으로 모든 것을 치마로 감싸 안듯 포용하겠다는 의미에서다. 3 광대. 조선 후기, 높이 28㎝. 검은 벙거지를 쓰고 오른팔을 들어 춤추는 모습. 왼손으로 허리춤을 잡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으로 표현됐다. 우리 문화의 원형을 보여 준다.

“꼭두극에 쓸 오브제를 만드는데 젊은 친구들이 한국인의 표정을 못 잡아내더군요. 우리나라 미술교육에선 서양인의 얼굴을 그리잖아요. 꼭두에는 한국인의 얼굴과 표정, 옛 복식까지 담겨 있었죠. 꼭두는 그렇게 제 존재와 완전히 밀착돼 있어요.”

그러나 연극계에 투자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격이었다.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남편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목숨을 걸었다. 89년 동숭아트센터를 개관했다. 이후 예술영화전용극장 ‘하이퍼텍 나다’를 열고, 연극인을 배출하는 최초의 아카데미, 희곡 작가를 육성하기 위한 ‘옥랑 희곡상’, 다큐멘터리를 지원하는 ‘옥랑 문화상’, 록펠러재단과 연계한 ‘옥랑 펠로십’ 등을 운영하며 문화예술계를 지원했다.

“저도 모르게 소외되고 외진 곳만 찾아다니는 거예요. 돌아보면 제작하고 기획한 게 다 최초더라고요. 그만큼 맨땅에 헤딩했고, 엄청난 시행착오를 30년 가까이 했다는 거죠. 삶의 절박성이 있어야만 치열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 같아요. 누구 부인이라는 타이틀은 우스운 거죠. 남편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내 존재를 찾지 못하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은 것과 같아요.”

꾸준함이 편견을 꺾었다. ‘돈 많은 사모님’이라며 고깝게 보던 시선들이 쏙 들어갔다. 그는 “문화란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란 철학을 내세운다.
“살린다는 건 소외된 것, 시간 지나가면 사라져 가는 것을 보편성의 수준까지 끌어올려 삶과 연결시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행위로 실천하는 게 문화운동이고요. 나 혼자 살릴 수 없으니 다각적으로 예술가를 발견해 지원하는 거죠. 그럼 사라져 가는 분야들이 살아나는 거고요.”

틈틈이 모은 꼭두가 2만 점에 달했다. 박물관은 임대로 내줬던 동숭아트센터 2층을 비워 차렸다.

“제가 정체성 혼란을 겪을 때 꼭두에게 위안과 치유를 받았으니 언젠가는 꼭두를 제대로 살려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박물관은 그 약속을 지켜 주는 일이죠. 돈 안 되는 박물관을 차린 건 어차피 죽을 땐 빈 몸으로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모든 것이 꼭두의 정신에서 비롯된 거예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면 블로그 ‘돌쇠공주 문화 다이어리(blog.joins.com/zang2ya)’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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