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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문제라고 덮지 말고 조직 내 ‘플랜B’를 세워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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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28면

강자들이 즐비한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기업은 핀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노키아다. 2000년 30.6%였던 세계시장 점유율은 이후 꾸준히 늘었고, 현재에도 30%대 후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반면 발트해 바로 건너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위치한 소니에릭슨의 운명은 이와 대조적이다. 이 회사의 전신인 에릭슨은 2000년까지만 해도 10% 이상의 점유율로 모토로라와 함께 노키아를 추격했지만 이후 급전직하하고 있다. 지난해 시장점유율은 5%로 10년 전에 비해 반 토막 수준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영④ 노키아와 에릭슨의 엇갈린 위기 대응

한때 경쟁구도를 형성했던 두 회사의 위치가 크게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한 사건에 대한 대처방식의 차이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태의 발단은 2000년 3월 미국 뉴멕시코 사막에 위치한 필립스 반도체공장의 화재였다. 갑작스러운 번개로 일어난 화재는 10분 만에 진화됐지만 반도체 공정의 가장 중요한 클린룸과 웨이퍼가 진화 과정에서 오염된 데다 연기가 전체 시설로 퍼져 피해가 커졌다.

화재 직후 필립스는 이 공장의 반도체부품을 공급받는 노키아에 일주일간의 조업 중단이 예상된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당시만 해도 이 화재가 중대한 비상사태로 비화할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뚜렷한 근거는 보이지 않았지만, 노키아는 추이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즉시 문제의 부품을 특별관리 품목에 올리고 전 부서에 이 사실을 알렸다. 위기관리부서가 중심이 돼 대응체제를 갖춘 상태에서 필립스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상황을 점검했다. 일부의 우려대로 화재 발생 2주일 후에야 필립스는 생산공정을 정상화하는 데 몇 개월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키아는 즉시 전 세계 필립스 공장의 생산 여력을 모두 노키아에 집중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같은 적극적이고 발빠른 대응은 즉각적인 성과를 가져왔다.

불이 난 공장의 부품을 사용하고 있던 에릭슨도 사고 발생 후 노키아와 비슷한 시점에 필립스로부터 같은 내용의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에릭슨의 담당자는 일주일만 지나면 사태가 해결될 것으로 보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특별히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으며, 화재로 비롯될 충격과 파장에 대해 깊이 조사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글로벌 공급망 체계에서 단기간의 수급 지연은 흔히 있는 일이니 문제가 불거지면 그때 가서 다른 공급처를 알아봐도 될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이었다. 수주일이 지난 후에야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파악한 에릭슨의 경영진은 필립스로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필립스의 모든 생산 여력이 노키아에 투하됐기 때문에 에릭슨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반도체 공급처 역시 노키아가 이미 동원 가능한 설비를 모두 장악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에릭슨은 안이한 늑장 대처로 ‘플랜B’를 가질 수 없었다.

2000년 한 해만 휴대전화 사업부문에서 25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한 에릭슨은 2001년 세계시장 점유율이 6.7%로 전년도의 10%에서 급격히 하락했다. 휴대전화 생산 전면 중단 등의 비상조치를 취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 끝에 결국 소니와 지분을 절반씩 나눠 ‘소니에릭슨’으로 간판을 바꿔 다는 길을 택했다. 위기에 몰린 에릭슨에 비해 반사이익을 톡톡히 챙긴 것은 노키아였다.

필립스 공장의 화재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태와 그 결과는 기업의 위기관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견 작은 문제나 충격이라도 발생 시점에서 재빨리 내용을 감지해 조직 전체에 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의 ‘내부화’는 위기관리의 출발점이자 관건이다. 사실 노키아와 에릭슨이 필립스로부터 받은 경보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위기단계로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당자 입장에서는 대응태세를 결정하기 어려웠다. 두 회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초기 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는 판이했다.

유연성과 탄력성 역시 위기 대응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덕목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신속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충격에서 회복할 수 있는 탄력성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위기관리의 요체다.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협력업체, 유통·물류업체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글로벌 네트워크에서 기업이 직면하는 충격의 종류와 원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생산라인이 멈출 수 있는 직접적 원인은 비단 공장 내부에서뿐 아니라 납품업체 공장이나 운송시스템, 통신과 정보시스템 등 어느 쪽에서든지 생길 수 있다. 위의 화재 사태에서 노키아는 문제를 감지하는 순간 곧바로 주요 담당자로 구성된 위기대응 태스크포스(TF)를 조직하고 대체부품 공급 채널과 내부 잉여자원을 미리 확보해 놓는 등 효율적인 대응태세를 가동했다.

1999년 대만 지진으로 야기된 반도체 공급 차질에 대한 델과 애플의 대응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규모 7.6의 강진으로 전기 공급이 중단되면서 컴퓨터 칩으로 쓰일 반도체 웨이퍼가 모두 못쓰게 됐다. 소수의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점을 미리 간파했던 델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류부문 혁신에 주력해 단기간의 주문-생산-출하 사이클을 운영하면서 특정 모델이나 가격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을 확보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에만 몰두했던 애플은 소수 부품공급업체와의 장기공급계약에 매달린 나머지 지진으로 인한 부품조달 차질을 메울 만한 대체 공급원이 마땅치 않았다. 결국 회사의 사활을 걸고 야심차게 준비해 온 노트북인 아이북(iBook)을 제때 고객에게 제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애플이 시장을 잃은 반면, 델은 그해 3분기 순익을 전년 대비 41%나 높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도처에 위험이 널린 세상이다. 어디서 지뢰가 터지고 어디서 암초가 돌출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위기의 파장 또한 거대 기업의 명운을 좌우할 만큼 그 강도와 깊이가 심화되는 추세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고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을 예측하며 위험을 관리하는 대응능력의 확보 여부가 기업의 생사를 가름하는 중대 변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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