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90분간의 불꽃 튀는 연기, 독설과 냉소의 짜릿함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4호 05면

연극의 제목은 꽤나 거창하다. 제목만 보면 뭔가 예기치 않은 일이 전개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데 이 연극은 우습게도 두 꼬마의 싸움이 발단이다. 연극은 흥겨운 아프리카풍의 음악과 함께 관객을 프랑스 중산층 가정의 거실로 안내한다. 그곳엔 두 쌍의 부부가 열한 살 페르디낭과 브루노의 폭력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앉아 있다. 사건의 내막은 페르디낭이 브루노의 앞니 두 개를 몽둥이로 날려 버렸다는 것.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모인 두 부부의 티격태격하는 초반부의 대화는 일상적이며 평범하다. 그러나 이 도입부를 지나면 이내 연극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연극 ‘대학살의 신’

연극 ‘대학살의 신’은 억대 명화를 둘러싸고 벌이는 세 사내의 치졸한 질투극 ‘아트’로 잘 알려진 프랑스 여성 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신작이다. 이 작품 또한 ‘아트’와 같이 유쾌하고 흡입력 있는 대사들로 이뤄진 블랙 코미디다. 그사이 범상치 않은 이력도 쌓아 지난해 미국 최고 권위의 연극·뮤지컬상인 토니상 최우수연극상과 여우주연상, 연출상을 받았다. 평단의 혹독한 평가를 통쾌하게 통과한 셈이다. 이런 최신작이 거의 ‘리얼타임’으로 한국에 소개되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인데, 연극은 그 기대에 얼마나 부응할 수 있을까. 한껏 높아진 관객들의 기대에 중견 여성 연출가 한태숙은 발군의 역량으로 120% 이상 부응하는 근사한 무대로 답했다.

이 연극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식적이고 위선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활용품 도매상인 미셸(김세동)과 아프리카에 관심이 많은 작가 베로니카(오지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덕 변호사인 알렝(박지일)과 아내 아네트(서주희). 두 부부의 첫 만남은 우아한 중산층 거실의 모습에 걸맞게 예의 있고 수준 높은 대화로 시작한다. 인종 청소가 자행된 아프리카 다르푸르 유혈 사태에 대한 논쟁을 비롯해 제약회사의 횡포, 햄스터를 유기한 미셸의 윤리적 책임 등을 놓고 열띤 공방이 오간다. 인간의 원초적인 분노와 공포를 그림으로 표현한 프랑스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조롱의 대상이 되는 아네트와 베로니카 대화의 한 토막은 이렇다.

아네트:그림 좋아하시나 봐요?
베로니카:그림, 사진. 제 직업이랑 관련이 좀 있어요.
아네트:저도 프랜시스 베이컨 좋아해요.
베로니카:아, 예. ‘베이컨’요.

이처럼 위선적인 언사가 이글대는 이들의 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치하기 짝이 없는 애들 말싸움으로 변질된다. 심지어 이익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 모리배처럼 이야기 주제에 따라 생각이 다르면 부부 사이에도 등을 돌려 상대방 편을 든다. 거침없는 독설과 비하, 상대를 무시하는 인물들의 이러한 냉소적이고 극단적인 행동들은 “오늘 정말 지랄 같아!”라는 아네트의 외마디 비명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어찌 보면 단순한 스토리지만 한 시간 반 동안 극을 이끌어 가는 텍스트의 탄탄한 힘은 정말 대단했다. 연극은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 전환이나 배우의 등·퇴장이 거의 없는 데도 지루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간소한 소파와 탁자 몇 개 외에 기교를 부린 무대 세트도, 귀를 간질이는 음향 효과도 없다. 끊임없이 오가는 배우들의 대화가 무대의 ‘빈 공간’을 꽉 채우는 주인공이다.

서로 짝을 이뤄 그 수다스러운 대화를 노련하게 실어 나르는 김세동-오지혜, 박지일-서주희의 불꽃 튀는 연기는 말 그대로 ‘명연의 향연’이었다. 이들은 시종일관 진지한 모습으로 연기하지만 웃음의 포인트에서 자신을 버리는 계산된 표현도 능란했다. 특히 매회 고통을 감수해야 할 실감나는 구토 연기를 보여 준 아네트 역 서주희의 히스테릭 하지만 희생적인 코믹 연기는 단연코 이 작품을 살리는 백미였다.

연극은 꽉 짜인 퍼즐처럼 탄탄한 희곡과 배우들의 최상급 연기, 노련한 연출 등 3박자로 무장한, 오랜만에 맛본 ‘연극다운 연극’이었다. 예술적인 완성도에다 대중적인 흡입력을 동시에 갖춘 연극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한데 무시무시한 제목의 연극 ‘대학살의 신’은 그런 연극의 참고서가 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연극은 늘 ‘가면(위선)’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속물적 삶에 가하는 ‘학살의 시간’이기도 했다. 5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