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부양의무자 기준 없애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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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생활보호제도의 빈틈은 외환위기로 뚜렷하게 드러났다. 순식간에 수백만 명의 빈곤층이 등장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당시 한국 사회의 위기를 관찰하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우리의 허를 찌르는 물음을 던졌다. “수십 년 동안 7~8%씩 경제성장을 이뤄낸 사회가 단지 한 해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다고 이런 혼란에 빠질 수 있는가?” 우리는 2000년 근대적인 빈곤정책을 도입함으로써 그간의 경제적 성공신화에 걸맞은 최소한의 품격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사회안전망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데 빈곤층은 늘어만 간다. 한국 노인 중 45%가 빈곤층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 발표는 당혹스럽다. 최근에는 기초보장제도에 여전히 큰 구멍이 뚫려 있음을 상기시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직도 100만 명이 넘는 극빈층이 기초보장제도의 울타리 밖에 있고, 이들 다수가 자식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정부로부터 외면당한 노인들이다.

기초보장제도는 부양 의무자 기준이라는 생활보호제도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일정 액수를 넘는 소득을 가진 자녀가 있는 노인에 대해서는 가난하더라도 기초보장급여 자격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자녀가 능력이 있으면 노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얼핏 들으면 당연한 이 조항 때문에 그 많은 노인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부양의무를 지우는 소득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스스로도 생활고에 허덕이는 자녀들에게까지 부담을 지웠다.

사실 노부모가 극빈생활을 하는 자녀 중에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같은 연구기관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과반수가 자녀가 노부모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는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절대다수 국민은 빈곤 노인의 생계지원만큼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부양의무자 기준의 또 다른 문제는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자녀가 받아야 할 벌칙을 노부모가 감당하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정부는 부양능력 있는 자녀에게 노인의 생계비 지원 부담을 지우지만, 자녀가 부양비를 내지 않는다 한들 선뜻 따지고 들 노부모는 많지 않다. 결국 이래저래 피해를 보는 것은 자녀의 부양도,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노인일 뿐이다.

이제 열 돌을 맞은 기초보장제도는 새로운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부양의무라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을 벗어버릴 때가 됐다. 더 늦기 전에,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서 기댈 곳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노인들에게 우리 사회의 따뜻한 손길을 전하자.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