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精文硏원장이라는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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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정신문화연구원(精文硏)이 정치 외풍에 시달리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이상주(李相周)전 원장의 후임을 민주당 장을병(張乙炳)최고위원이 맡기로 하면서 정문연의 독립성과 정치적 입김을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학 운영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정문연의 침체한 분위기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은 李전원장은 세군데서 대학총장을 지냈고, 신임 張원장도 "고향(학계)으로 돌아간다" 는 본인의 표현대로 대학 총장 출신이다.

문제는 한국학 연구.교육의 대표적 기관인 정문연이 정치쪽과 잦은 교류를 한다는 점이다. 현 정권 들어 한상진(韓相震)전원장.李전원장.張원장으로 이어지는 정문연의 책임자 임명 과정에 정치권의 입김이 들어간 흔적이 여러 군데다.

韓전원장이 퇴임 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장관급)으로 간 것은 정문연의 학문적 중립성과 관련해 개운치 않은 시비를 일으켰다. 李전원장은 청와대 비서실장 기용 때도 그렇지만 현 정권의 TK(대구.경북)출신 보완 인사라는 관측을 낳았다.

이번 張원장의 경우도 정문연 이사회가 선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그 전에 대통령의 낙점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정계입문 뒤 통합민주당→국민신당(1997년 대선 이인제후보 출마)→국민회의 합당 등 張원장의 짧은 정치생활 동안 우여곡절의 행적은 정문연의 이미지에 부담을 줄 만하다.

무엇보다 현 정권이 정치쪽과 높은 담을 쌓아야 할 연구기관의 장(長)자리를 정권 획득의 전리품(戰利品)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정문연이 정부 출연기관인 만큼 정권적 차원의 인사운영을 하겠다는 발상이 깔린 듯하다.

연구기관이 정치 바람에 휩싸일 때 학문적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올해로 창립 23년째인 정문연은 출범 때부터 유신이념의 산실이라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고, 그 후에도 여러 시련을 딛고 순수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어렵사리 확보해 왔다. 그런 정문연이 권력과의 교류.유착 인상을 주고 있는 현상은 현 정권이 자성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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