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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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장 신라명신

과연 숲 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트인 공간이 드러났다.

석축을 쌓아 만든 작은 무덤 하나가 누워있었다.

돌로 만든 석등 두개가 무덤 양옆에 놓여 있었고, 주위로 석주들이 둘러가며 방책을 이루고 있었다. 함부로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철문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무덤 주위는 울창한 나무들이 없어 봄날의 양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무덤 앞에는 당간(幢竿)처럼 보이는 기둥 하나가 꽂혀 있었다.

막연히 천년의 세월이 지나 돌보는 사람이 없어 황폐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무덤은 제법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덤 앞에는 작은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위 제병 속에는 한묶음의 꽃마저 꽂혀 있었다.

나는 다가가 그 꽃의 정도를 살펴보았다. 꽃은 오래되어 시들어 있지 않았다. 갓 따다 꽂은 생화(生花)는 아니었지만 아직도 생기가 남아있을 정도로 싱싱하였다. 더구나 돌로 만들어 놓은 제병 속에는 꽂아놓은 꽃들이 쉽게 시들지 말라고 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물이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2, 3일 전에 찾아와 꽃을 바치고 화병 속에 물을 가득 부어놓은 모양이었다.

- 그렇다면.

나는 꽃다발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 누군가 정기적으로 이 무덤에 들러 성묘를 하고 그럴 때마다 꽃을 헌화한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근처 어딘가에 신라사부로의 후손들이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찾지 않는 황폐한 숲 속, 인적마저 완전히 끊긴 신라사부로의 무덤이 이처럼 잘 단장되어 있고, 제단 위에 시들지 않은 꽃들이 헌화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라사부로를 추모하는 후예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것인가.

무덤 주위로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벚꽃가지 위 어딘가에 산새라도 앉아있는 듯 한쪽에서 삐찌삐찌 노래하면 맞은쪽에서 뻐찌뻐찌 하고 화답하였다. 너무나 만개하였기 때문이었을까. 경미한 새소리에도 화들짝 놀란 꽃잎들이 제풀에 떨어져 흩날리고 있었다. 떨어진 꽃잎들이 신라사부로의 무덤 위를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신라사부로의 무덤을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나는 이곳에 무엇 때문에 왔는가. 신라사부로의 넋을 기리기 위해 왔는가. 아니면 신라사부로가 입고 다니던 붉은 갑옷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는가. 신라사부로의 가문과 미데라와의 인연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정말 생각지도 않게 신라명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지 않았던가. 신라명신이 신라사부로의 수호신임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신라명신을 보기 위해서 슌묘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신라명신.

그러나 나는 놀랍게도 신라명신의 실제 모델이 장보고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었을까.

그 신라명신이 바로 부활하여 나타난 장보고의 현신임이 밝혀진 이 모든 과정이 한갓 우연인 것일까.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부정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인 것이다. 다케다 신겐의 무적기마군단이 들고 다니던 깃발과 입고 다니던 붉은 갑옷은 낚싯줄에 매달린 부표(浮標)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저 부표에 꿰어 달린 미끼는 나를 역사의 심연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낚싯밥인 것이다.

나를 미끼로 유혹해서 저 역사의 심연 속으로 끌어들인 저 정체 모를 사람은 누구인가. 교묘한 방법으로 나를 역사의 바다 속으로 침몰시킨 수수께끼의 인물은 누구인가.

장보고.

신라의 귀족들은 그를 섬사람이라 멸시하여 해도인(海島人)이라고 불렀으니, 나를 역사의 바다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바로 섬사람, 장보고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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