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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학 배우는 ‘학생’으로 격하된 식민지 한의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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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대한제국 시기의 한의원. 1882년 혜민서 혁파를 계기로 국가에 의한 한의학 교육은 사실상 폐지되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의료 개입이 본격화하자 한의학 교육 기관으로 동제학교가 설립(1906년)되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 한의학은 사설 강습소를 통해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한의학 연구와 교육이 체계화한 것은 해방 이후였다. (출처:『서양인이 본 조선』)

1917년 4월 30일 오전 종로경찰서에 한의사 170여 명이 다카하시(高橋) 경찰의(警察醫)에게 강의를 듣기 위해 도포 차림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관내에서 개업하고 있는 ‘의생(醫生)’들로서 이날부터 열흘 동안 ‘학생’ 자격으로 아주 기초적인 해부학·생리학·위생학 등을 배웠다.

이 땅에 양의(洋醫)가 진료하는 서양식 병원이 첫선을 보인 것은 병자수호조규 이듬해인 1877년 2월이었다. 일본 해군이 운영한 제생의원은 일본 거류민뿐 아니라 인근 조선인도 진료했다. 지석영이 처음 종두법을 배운 것도 이 병원에서였다.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양식 병원은 개항장마다 하나씩 생겨났다.

1885년 조선 정부는 미국 공사관 부속의사이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을 진료 책임자로 하여 서울에 제중원을 개원했다. 그 뒤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홀 부부(William James Hall과 Rosetta Sherwood Hall) 등 선교사들도 각지에 서양식 병원을 세웠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전까지 이 땅에는 정부가 직영하는 국립병원, 일본인들의 거류민 병원, 선교사들의 선교병원 등 상당수의 서양식 병원이 있었다.

그러나 양의 양성은 아주 더뎠다. 1886년 전국 8도에서 2명씩 선발해 실시한 제중원의 의학 교육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99년에 가서야 의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해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실시했고, 같은 해 에비슨(Oliver R. Avison)도 제중원에서 한국인 조수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의학을 배우고 귀국해 의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한의(漢醫)’를 도태시켰던 일본은 한국에도 일본식 의료제도를 이식하려 했으나 그러기에는 양의가 너무 적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의생규칙을 제정해 한의사를 ‘의생’으로 고쳐 불렀고,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제한된 지역에서만 활동하도록 했다. 이에 한의는 ‘의사(醫師)’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의생’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 정책 아래에서도 한의학은 살아남았고, 해방 이후 시민권을 회복했으며, 근래에는 특히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우리나라 의료에서 한방과 양방 사이의 갈등은 한 세기가 넘은 문제다. 그러나 양쪽 의사들 사이의 갈등은 오히려 부차적이다. 양방과 한방 중 어느 쪽을 택할지 환자가 먼저 선택해야 하는 이원적 의료 체계는 불편하고 위험하다. 의료일원화 문제를 마냥 방치해 둘 수 없는 소이(所以)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 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