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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이어령 중앙일보고문-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대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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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미국이 당한 테러공격은 21세기의 전쟁의 성격과 함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 없는 사조직이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해 수천명의 민간인을 살상한 묵시록 같은 사건의 전체를 이해하려면 그 문명사적인 의미를 짚어봐야 한다. 이어령(李御寧)고문과 김영희(金永熙)국제문제대기자의 대담을 마련했다.

金=21세기의 첫해에 미국이 당한 테러공격은 세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미국 본토가 처음으로 적대세력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 둘째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세계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군사력을 상징하는 국방부가 공격목표였다는 것, 셋째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은 아직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이 국가를 공격하고, 빈곤지대의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풍요한 과실을 향유하는 사회의 사람들을 살상하고,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도들을 공격했습니다. 테러의 목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문명의 충돌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분명히 문명사적인 의미는 있는 것 같습니다.

李=지구상의 온 인류가 평화와 희망의 상징으로 2000년 뉴 밀레니엄의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을 감상했지만 그것은 곧 맨해튼의 무역센터가 인간미사일에 의해 폭파되는 테러 현장으로 변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20세기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대량전쟁(Mass War)은 아닙니다. 20세기의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연대해 싸우는 세계의 대전이었고 핵 같은 대량살생무기를 동원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보는 전쟁 모델은 이런 상식을 뒤집는 것으로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와 개인차원의 테러집단과의 싸움입니다.

金=비이슬람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테러범들을 움직이는 죽음의 본능, 저 타나토스(Thanatos)의 정체입니다.

납치한 여객기로 승객들을 태운 채 1백10층 높이의 빌딩에 정면충돌해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저 충동과 에너지가 뭡니까. 너는 죽을 용의가 없지만 나는 웃으면서 너를 죽일 용의가 있다는 광기(狂氣)말입니다.

그들은 미국이 중동의 석유이권을 독점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해 아랍인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고 믿고 미국의 중동정책을 분쇄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이 바뀌어 아랍세계에 천년왕국이 온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의 잿빛 동굴에 숨어서 최첨단의 정보통신기술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도 놀랍고 끔찍합니다.

李=중세의 팍스(Pax.평화)는 영주들이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전쟁을 해도 일반인들은 희생시키지 않는 평화체제를 의미했습니다. 오늘날의 팍스는 정반대로 국가끼리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일 뿐 군사시설이나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들이 전쟁상태의 주체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는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1945년부터 90년에 이르는 2천3백40주 동안 정쟁이 끊인 날은 2주밖에 안되고, 지금도 46개국이 내전이나 전쟁수준의 인종분쟁과 종교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 때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탄생한 국민국가는 와해 또는 쇠퇴하고,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토대로 한 소수파의 원리주의 집단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일본의 옴진리교에서 이미 그것을 목격했습니다.

金=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로 미국의 함정들을 공격했지만 그 대상은 어디까지나 민간인이 아니라 군사시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이번 사건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테러조직을 응징해 격앙된 국민 감정에 배출구를 열어줘야 하는데 응징의 대상이 확연하지 않고, 미국의 응징이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면 장기적으로는 이슬람권을 결속시키고 집단반발을 불러 정말 문명의 충돌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李=지금까지는 국가가 NBC(핵.생물.화학무기)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세계를 지배할 GNR(유전공학.나노테크.로봇기술)는 민간기업들이 개발하고 통제합니다. 개인들이 이런 기술을 사용하면 국가 전체, 세계 전체로 테러가 확산될 가능성이 커져요.

이런 개인과 집단 앞에서 국민국가가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국가들을 신의 나라(神國)와 보통국가로 구분한다면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리스트들은 신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보통사회는 생명.자유.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그들의 나라에서는 알라.테러, 또는 국가의 이름으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립니다.

이번 테러리스트들은 '알라 가미카제' 들입니다. 일본의 옴진리교, 알제리의 이슬람 원리주의자, 뉴욕의 자살특공대 같은 집단의 등장은 지난 2천년 동안 유지돼 온 근대적 합리주의와 나폴레옹 이후에 형성된 국민국가 개념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金=근대 국민국가의 모델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대단히 왜곡된 세계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글로벌리즘의 물결을 타고 폭력의 세계화가 시작된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특정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배타적이고 편협한 생각도 문제인 것 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동유럽국가 대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유럽에는 유랑집단인 집시들이 많은데 서유럽에는 집시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동유럽에 보편적인 그리스와 러시아 정교회가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에 더 관용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관용적인 종교와 덜 관용적인 종교를 비교한 것인데 닫힌 사회의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재앙의 하부구조 노릇을 하는 것 같습니다.

李=새뮤얼 헌팅턴은 문명과 문화를 구별하지 않아요. 아랍권에도 텔레비전이 보급돼 있지만 텔레비전에 자물쇠 장치가 돼 있습니다. 가부장제도로, 열쇠를 가진 사람이 TV시청을 관장합니다. 텔레비전의 내용과 그것을 보는 방법은 문화입니다.

그레이하운드의 자동차가 들어갈 수는 있어도 그 상표인 그레이하운드의 개 그림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수송수단인 버스는 문명이지만 개를 그린 로고는 문화입니다. 이슬람권에서 개는 악마의 사자입니다. 문명은 이성을 토대로 해 보편적인 것이지만 문화는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金=비합리적인 문화의 갈등이 축적되면 이성적인 문명의 충돌로 이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당장 미국의 고민은 그런 문화의 갈등이 존재하고, 특정 종교를 광신하는 특정문화권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못사는 책임을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또는 일본으로 돌리는 한 테러의 주모자로 지목하는 오사마 빈 라덴 한사람을 제거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하고 라덴을 검거하거나 죽이는데 성공해도 제2, 제3의 라덴이 훨씬 큰 규모의 테러를 감행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李=분명한 개체(個體)가 있는 상대를 다루기는 쉽습니다. 예컨대 황소나 말 같은 경우에는 다루기 어려울 것 같지만 총이나 채찍을 사용하면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반면 파리나 모기와 같은 존재들은 오히려 다루기 어렵습니다. 이번 테러 사건은 문명 대 문화의 충돌입니다.

문화가 문명화되면 보편성을 띱니다. 한국사회는 지난 19세기 초 개화기 때 이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들은 아직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해 글로벌 시스템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세계 시스템에서 소외된 0.01%의 집단이 이런 사건을 일으키고 있어요. 미국을 포함한 세속국가들이 어떻게 신정(神政)국가들을 자연스럽게 글로벌 시스템으로 편입시켜 나가느냐가 문제풀이의 열쇠입니다.

金=확실히 이번 사건은 헌팅턴이 주장한 문명의 충돌 시나리오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헌팅턴은 유교 문화권의 맹주인 중국이 이슬람권과 연대해 서양문명권을 공격한다는 내용의 문명충돌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권은 중국과 손을 잡기는커녕 그들 내부가 날카롭게 분열된 상태입니다. 아랍권의 부유하고 보수적인 국가들과 가난하고 과격한 국가들의 입장이 대립하고, 테러 응징에서 성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파키스탄도 내부적으로 대립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도 라덴 처리를 놓고 서로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李=리비아의 카다피 대통령은 여러차례 중국에 반미전선(反美戰線)형성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카다피의 제안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헌팅턴의 주장이 틀린거죠. 헌팅턴 이론의 가장 큰 오류는 한국을 중국문화권에 포함시키고 일본은 독자적인 문화로 구별한 것입니다.

金=일본 또는 아시아 문명에 대한 헌팅턴의 몰이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2년 전 헌팅턴이 중앙일보 초청으로 서울에 왔을 때 그 점을 추궁했는데 직접 답변을 피했습니다.

李=헌팅턴의 문명 충돌 이론은 유교(儒敎)에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유교의 핵심은 중용(中庸)으로, 기본적으로 튀는 걸 싫어해요. 유교는 삼교일체(三敎一體)라고 해서 이질적인 문화와 조화를 꾀합니다.

예컨대 서양에서는 여러 동물을 합쳐놓으면 '키메라' 라는 괴수(怪獸)가 되는 반면 동양에서는 여러 동물을 합쳐놓으면 멋진 용(龍)이 됩니다. 용은 사슴의 뿔, 독수리 발톱, 잉어의 비늘을 가진 상상의 동물입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주장한 원융회통(圓融會通)사상도 모든 것이 만나 통한다는 대단히 글로벌한 개념입니다. 불교는 초월적인 종교지만 유독 우리 불교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세속을 중시했습니다.

金=우리가 반성할 점도 있습니다. 이번 테러공격의 저변에는 수십년간 누적된 엄청난 문화적 분노가 깔려 있는데 거기에 너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보다 구조적이고 심층적인 문명읽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李=현재 전세계에는 3천개의 문화가 있는데 국가 숫자는 2백여개에 불과합니다. 문화와 문명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으면 충돌과 내분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한국은 주로 정치.군사.경제적인 텍스트를 통해 세계를 읽어왔습니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를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슬람권뿐 아니라 동남아 사정에도 어둡습니다. 지금 같은 신문 가십이나 TV의 심야토론 수준으로는 안됩니다. 문화를 문명으로부터 분리해 생각하는 시각과 문화를 상대주의로 보느냐 보편주의로 보느냐에 따라서 21세기 세계의 구도와 평화의 문제가 달리 보입니다.

문화상대론에 집착해 무슨 짓을 해도 그건 그 사람들의 문화라고 생각하면 세계는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서양문화만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론은 문화의 다원성과 포용성을 해치게 됩니다. 문화를 보편적인 문명의 수준, 특히 21세기의 정보 지식 문명으로 끌어올리는 방법만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변선구 기자

정리=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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