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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주적만난 세계 최강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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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뉴욕 명물인 쌍둥이 빌딩이 공격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필자는 월가에서 일하는 딸 걱정이 앞섰다. 무사하다는 말에 한숨 돌렸지만 잠시 후 남쪽 타워가 무너지고 잇따라 북쪽마저 폭삭 주저않지 않는가. 이번에는 딸의 전화도 먹통이었다. 가을날 눈부신 아침 해가 검어 보였다.

나중에 들으니 파편과 먼지 구름을 뚫고 나와 세 시간을 걸어 자기 집으로 대피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1만명이 넘었다 하니 진주만 때보다 몇곱절 큰 전쟁이 터진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 얼굴도 깃발도 없는 범인

9 .11은 미국의 번영과 군사력의 상징탑이 무너져내린 날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접은 날이다. 하루 2천만명이 하늘을 떠다니는 여행의 나라에서 5천개의 공항이 모두 문을 닫는 수모를 겪었다.

뉴욕 시민이 자동차를 버리고 다리를 걷는 모습은 마치 6.25 때 대동강 철교에 엉겨붙었던 피란민 대열 같았다.

누가 '역사의 종언' 이라 했던가. 자유 민주주의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평천하(平天下)를 이룩했다는 가설 말이다. 그 자유 민주주의의 종가집에 새로운 적이 던진 불기둥이 치솟은 것이다.

"전쟁이 무서워 이민 왔더니 이게 웬 날벼락이냐" 는 한 교민의 푸념처럼 역사는 끝나지 않은 채였다. 나치즘과 파시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 모든 이즘을 다 이겨냈지만 초 강대국에서 주적(主敵)이 나타난 것이다. 테러리즘이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은 하루 5만명의 일터였다. 미국이 10년간 베트남전에서 잃은 5만명의 목숨을 테러리스트는 단 한방에 노린 것이다.

하지만 9.11은 진주만도 베트남도 아니다. 적은 얼굴이 없고 깃발이 없다. 핵 항공모함이 바다에 떴지만 어디를 칠 것인가.

악을 벌주는 전쟁이라지만 누구와의 전쟁인가. 아프가니스탄은 올림픽 입장 때나 선두이지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다. 융단폭격으로 때려봐야 오랜 전쟁으로 이미 초토화된 채 악만 남은 나라다. 오사마 빈 라덴을 도려낸다 해도 그를 순교자로 만들 뿐 테러를 잠재울 수는 없다. 아랍 이슬람 세계와 등 돌리고 평화가 오리라 믿는 사람은 드물다.

외교는 무력하고 경제제재는 우방과 손발이 맞지 않지만 군사행동에도 한계가 있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은 적이 시작했지만 전쟁을 끝내는 것은 우리의 선택" 이라 했으나 미국은 시작보다 끝내기가 어려운 전쟁에 빨려들고 있다.

미국은 크게 얻어 맞아야 일어나는 나라다. 전쟁 없는 슈퍼파워는 무기력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았듯 경제공황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전쟁에서 솟구친다. 의로운 전쟁일 때는 지도자를 따라 초당적으로 뭉친다. 하지만 지루한 전쟁의 장기화로 희생자가 늘 때 여론은 팔랑개비처럼 뒤바뀐다.

여야의 한 목소리는 미사일방어망 구축에 청신호라 보는 이도 있지만 되레 미사일 무용론이 목청을 높일 것이다. 달랑 비행기표 한장과 주머니 칼을 쥔 테러리스트에게 뚫리는 하늘을 어찌 미사일로 막을 것인가.

도끼로 모기를 치는 격이다. 한해 우리 돈으로 50조원을 쓰는 정보기관이 신출귀몰하는 테러범에 두손 든 것 아닌가. 전자정보와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테러망을 당해 낼 수 없다. 정보는 기고 테러는 날았다. 스타워즈 대신 인간 정보에 돈을 쓰자는 것이다.

** 증오심 녹여야 테러 막아

개방사회로 갈수록 우리는 테러리즘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피를 부르는 광신적 극단주의를 지구상에서 싹쓸이할 수는 없다. 안전 제일주의가 테러를 이기는 첫째조건일 뿐이다. 우리는 거창한 군사 안보에는 팍 죽어도 개인과 사회의 안전의식은 허술하다. 국가안보와 직결된 항공안전이 시간당 최저임금을 받는 보안관에게 맡겨진 현실이 충격적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국이 강건너 불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비극을 통해 미국민들이 보여준 침착성과 단결력, 그리고 구조.헌혈.봉사 등 협동정신은 안전불감증 사회가 본받을 만하다.

테러는 증오의 범죄다. 테러리즘을 물리치려면 증오심을 녹여야 한다. 결의에 찬 극도의 증오심이 아니고는 대형 비행기를 몰고 도심의 마천루를 향해 돌진할 수 없을 것이다. 증오심을 당해낼 최첨단 무기란 없음을 우리는 보았다.

崔圭莊(재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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