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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북한, 시간을 낭비말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미국이 대(對)테러 '전쟁' 을 선언한 긴박한 상황에서 남북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테러 지원국이자 불량국가로 낙인 찍힌 북한이 이번에 "테러와 연관된 어떤 세력도 응징하겠다" 고 나선 미국에 의해 만의 하나 이슬람권 적대국들과 같은 범주의 나라로 취급되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고 이에 북한이 반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 6개월만의 장관급 회담

멀리 갈 것 없이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을 되살려 보면 된다. 한국을 아직도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지역으로 간주하는 해외자본이 한국에서 발을 빼거나 투자를 관망하는 입장으로 돌아설 경우 외환위기를 겨우 벗어난 우리 경제는 또한번 크게 휘청거릴 것이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많은 부모는 휴전선의 대치에 또 얼마나 가슴 졸일까.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일관된 대북정책은 절실한 시점에 중요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북한은 한국보다 하루 늦게 사건 다음날인 12일 테러 반대 성명을 냈다. 테러 반대는 지난해 조명록의 방미 때도 표명됐던 것이지만 북한의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됐을 것이 틀림없다. 6개월 만에 재개된 회담에서도 북측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세대교체된 대표단의 언행은 훨씬 유연하고 세련됐다는 평가다. 북측이 제시한 11개 의제 가운데는 전력 지원, 장기수 송환처럼 논란을 부를 안건도 들어 있지만 경의선 연결 등 다섯가지는 남측의 제안과 일치했다. 나머지도 수용 가능한 사안들이어서 회담은 성과를 예약하고 시작한 셈이 됐다.

이런 모든 것을 북한의 협상전략이라고 해도 관계없다. 북한은 지난 3월 13일로 예정됐던 장관급 회담을 회담 당일에 일방적 통고로 연기했던 것이 사실이고, 합의를 하더라도 언제 또 무슨 핑계로 무슨 엉뚱한 주장을 할지 모른다는 불신이 아직 크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어떤 협상전술을 쓰건 시간을 끌어 얻을 것이 없다는 객관적인 상황이고 구조다.

북한은 클린턴 정부 시절 북.미 수교협상을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진전시켰다. 만일 그 합의가 6개월만 앞당겨졌던들 미국의 정권교체로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미국측 핵심 관계자들을 포함한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리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등 현재의 난국을 벗어날 돌파구를 마련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분석이다. 남북 정상회담도 더 빨랐다면 어땠을까. 또 미국의 정권교체에 따른 정세변화를 이유로 남북관계를 6개월간이나 동결시키기보다 오히려 가속시켰다면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다.

북한 지도부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른바 지구촌시대에 폐쇄.고립의 길을 언제까지 고수하는 것도, 외부의 원조에 기대 상황을 연장해 가는 것도 다 한계가 있다.

그리고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동족국가 한국 말고 진정으로 북한의 어려움을 도와줄 나라는 없다. '천지개벽' 의 산업화를 진척시키고 있는 중국, 80년에 걸친 공산혁명 실험 실패의 후유증을 벗어나 새로운 민족국가의 길을 가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을 현장에서 본 북한 지도부도 세계사의 큰 흐름을 모를 리는 없다.

*** 세계사 큰 흐름 인정해야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선 안된다. 합의만 하고 실천은 미루는 방식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청산해야 한다. 민족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자면서 한국을 제치고 미국을 먼저 상대하겠다는 자가당착도, 화해협력을 추구하는 남쪽 정부를 일방적인 행동으로 곤경에 빠뜨리는 자승자박도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됐다.

늘 말하는 '통큰 정치' 로 남북 현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실천이 필요하다.

'천하대란' 의 형세인 21세기 벽두, 남북한 어느 일방의 잘못된 선택도 한민족의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엄중한 상황에서 북한 지도부의 양식과 결단을 기대한다.

문병호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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