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분단현장을 가다]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⑥ 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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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전방의 병사들은 밤새 초소 경계근무를 마치고 날이 밝아야 비로소 막사로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지난 9일 새벽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의 한 해안에서 야간근무를 마친 율곡부대 장병들이 마지막으로 수색정찰하고 있다.

삐라를 주워 신고하면 연필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내 친구는 삐라 스무 장을 파출소에 가져다 주고 표창장과 연필 한 다스를 받았었다. 삐라를 습득했을 경우에는 읽지 말고 그대로 인근 파출소에 신고하라는 학급 게시판의 안내문도 기억난다. 보아서는 안 되는 것,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 그러나 연필이나 공책이 뒤따라오는 것. 그 당시 삐라는 뜻밖의 ‘불온한’ 횡재였다. 불운하게도 나는 단 한 번도 삐라를 주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연필을 받을 수 있는 횡재도 못 얻었지만, 읽으면 안 된다는 삐라의 내용이 궁금했더랬다.

삐라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게 된 것은 고성의 민통선 안에 있는 DMZ 박물관에서였다. 전쟁 동안 뿌려진 유엔군의 삐라가 660종으로 약 25억 장. 북한 쪽의 대남 삐라는 367종으로 약 3억 장 정도를 살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삐라를 보니 전쟁이 보였다.

전쟁이 발발했다. 전선은 무너지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흘 후 하늘에 나타난 B-29에서 삐라가 떨어졌다. 미 극동사령부 심리전과에서 한국 땅에 살포한 첫 삐라였다. 남한 군인들에게 최대한의 항전을 격려하고 남한 주민들에게 유엔과 우방들이 한국을 도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날 뿌려진 삐라는 무려 1200만 장.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한 남한 주민들은 유엔군의 삐라를 받아보고 미군이 남한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한군을 대상으로 한 첫 삐라는 7월 17일에 뿌려진 신문 형식의 뉴스 삐라 ‘낙하산 뉴스’였다. 괴뢰군은 전면적으로 퇴각하고 있으며 연합군이 서울을 완전히 탈환했다는 내용이 맥아더총사령부 이름으로 새겨져 있었다.

‘무시무시한 유엔군 무기 앞에 선 공산군. 유엔군 전선 뒤에는 증가하는 공업생산력이 있다. 연합군과 대한민국 군에게 포위섬멸을 당하고 있는 북한 괴뢰군들! 백성들의 입을 막아놓고 공산당은 거짓말 방송에만 분주하다. 보라, 공산괴뢰가 조국을 팔아 노예국가로 만들고 있다. 자유를 빼앗는 공산주의 마수! 향락에 도취해 노는 공산당들을 바라만 보고 굶주림에 우는 인민들도 가엾다’.

국제전 양상을 띤 한국전쟁은 치열한 선전전이기도 했다. 미군은 “적을 삐라로 파묻어버리겠다”며 막대한 양을 살포했고, 북한군과 중공군도 지지 않고 삐라를 적극 활용했다. 양측이 뿌려댄 삐라는 28억 장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왼쪽 남측 삐라는 한국전쟁 때 뿌려진 것이다. ‘안전보장 증명서’라는 제목을 달아 마치 법적으로 권리가 보장된 문서 같은 느낌을 준다. 맥아더 장군의 권위에 기대 좋은 음식도 주고 치료도 해주겠다고 선전한다. 오른쪽 북한 삐라는 비교적 최근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골칫거리인 실업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서로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삐라의 속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 장의 종이에 사진이나 그림과 함께 간단한 문장으로 구성된 삐라는 그 당시 가장 유용했던 심리전 중 하나였다. 심리전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전선과 후방,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 총력전이다. 삐라는 무력전을 지원하는 보이지 않는 병기다. 삐라는 심장을 꿰뚫고 들어가 불안감을 조성하고 전의를 무너뜨린다. 삐라는 머릿속에서 고향을 떠올리게 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게 한다.

‘현명한 북한 병사 세 사람…우리는 전선에서 심대한 부상을 입고 유엔군 쪽으로 넘어왔소. 친절한 유엔군은 곧 우리를 도와주었소. 그리고 우리는 유엔군 포로병원에 입원해서 좋은 치료를 받고 이제 완쾌했소. 지금 우리는 음식도 잘 먹고 하루하루 화평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소’.

고향에 있었으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전장에 끌려 나와 고생하지 말라는 연합군을 향한 북의 삐라도 보인다. 한국군 내부를 이간시키기 위해 이승만의 부정이나 한국군 지휘관의 친일 경력 등을 실례로 하여 삐라를 제작하기도 했다. 북한군의 삐라는 감성적이고 보다 극단적이었다. 전쟁이 교착단계에 들어서자 심리전은 더 치열해졌다. 삐라의 80%가 이 시기(1951년 6월 23일~53년 7월 27일)에 DMZ 및 접경지역 일대에 집중적으로 뿌려졌다. 중심 주제는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 ‘안전보장증명서’ 형식이나 먼저 귀순한 사람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여주는 사진과 편지 형식이 많이 이용되었다.

‘북한군 장병들에게…살려면 지금 넘어오시오. 더 대항해도 소용없다. 유엔군은 잘 대우할 것을 약속한다. 곧 넘어오라. 될 수만 있으면 길로 오시되 그렇게 안 되면 들판을 걸어오시오. 두 손을 들고 오시오. 그래야만 국제연합군과 대한민국 군은 당신이 귀순하는지 알 것입니다’.

‘리승만 괴뢰군 장병들이여 미군 놈들과 리승만 도당들에게 기만되어 아까운 목숨을 버리지 말라. 이 보증서는 신변의 안전을 절대로 보장한다. 충분한 식사와 주택을 보장한다. 이 증명서는 한 장으로 몇 명이든지 사용할 수 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의 김일성 별장. 한국전쟁 전 북한 땅이어서 김일성이 별장으로 사용했었다.

실제로 포로로 잡힌 대부분의 병사가 안전보장증명서 형식의 삐라를 소지하고 있었고, 포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삐라를 읽고 자진해서 항복을 결심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삐라는 종이 폭탄이라 하고, 심리전을 총성 없는 전쟁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삐라를 통한 심리전은 계속되었다. 서로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서로에 대한 증오와 서로의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남북으로 귀순한 군인들을 삐라에 내세워 이념 공세의 우위를 강조하기도 했다. 70년대 이후에는 경제발전을 홍보하는 양상으로 이어졌다. 내가 보지 못했던 삐라들이 바로 이 시기의 것들이다. 그리고 삐라는 여전히 뿌려지고 있다. 국가적인 차원이 아니라 종교단체와 탈북자 단체 등 민간 차원에서 뿌려지는 것들이다. 이른바 ‘삐라’(대북전단) 보내기 운동으로 잘 알려진 자유북한운동연합이, 김정일의 생일인 지난 2월 16일에도 삐라를 보낸 바 있다. 풍선에 담아 날려보내는 삐라는 물에 젖거나 찢어지지 않는 비닐 재질로 만들어졌다. 이런 걸 삐라의 진화라고 해야 하나. 삐라는 물론이고 CD, 1달러짜리 지폐, 초콜릿 같은 것들도 함께 넣어 보낸다.

삐라를 뿌리는 이들은 이 삐라들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진실의 어뢰’라고 믿고 있다. 북쪽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모든 선전활동을 중지하기로 확약한 쌍방 군부 합의의 난폭한 위반이고 전면 도전이라고 비판하면서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DMZ 박물관 입구에는 대형 전광등이 설치되어 있다. 지난날 전방에서 대북 선전문구를 밝히던 전광판이다. 예전에 DMZ 지역에는 대남·대북 방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더 큰 국기를 더 높게 달기 위해 깃대를 높이 세웠다. ‘남으로 오라’ ‘북으로 오라’는 구호는 상호 교류가 아닌 귀순을 유도하는 글귀였었다. 지금 저 전광등에 새겨져야 할 글귀가 과연 무엇일까. 진심으로 생각해봐야 할 때다.

천운영·소설가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 국방부·육군본부, 강원도 고성군, DMZ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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