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계좌추적, 검찰 맘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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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지 않고 금융감독원에 협조 공문을 보내 계좌추적을 해온 것으로 밝혀져 말썽이 되고 있다. 법률 집행기관으로서 가장 모범적으로 법을 지키고 국민의 인권보호에 앞장서야 할 검찰이 수사편의를 위해 편법을 동원한 것은 충격적이다.

문제의 협조 공문은 올해 2월 22일자로 '수사 협조 의뢰' 란 제목 아래 "주가조작 혐의로 조사의뢰하니 협조해 달라" 는 주문과 함께 조사 대상 기간, 7개의 계좌번호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또 말미에는 "계좌추적은 위 혐의자에 대해 특정해 주시고 혐의자에 대한 문답은 필요 없음" 이라고 기재돼 있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 명의지만 찍혀있는 도장으로 보아 수사검사가 전결 처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대해 검찰은 "검찰 등 국가기관이 조사를 의뢰한 경우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는 금감원 증권선물조사 업무규정을 근거로 위법성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협조 공문은 영장 없이 계좌추적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검찰이 입수한 범죄 첩보 내용을 금감원에 통보한 것이라는 해명이다. 주가조작 혐의자에 대한 금융감독원 조사의뢰는 법률상 당연하고 적법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좌추적이 의뢰된 사건은 검찰에서 주가조작 혐의 첩보를 입수해 금감원에 수사협조를 의뢰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공문을 살펴보면 검찰이 수사 착수 단계에서 영장 없이 계좌를 추적할 권한이 있는 금감원을 편법으로 동원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금융 거래의 비밀 보장은 민주국가 국민의 기본권일 뿐만 아니라 경제 정의나 건전한 경제 발전을 위한 필수 요소다.

금융실명제법의 제정 목적도 바로 금융거래의 비밀 보장이 아닌가. 이를 모를 리 없는 검찰과 금감원이 보도자료를 통해 편법 수사 행위를 감싸는 것은 또다른 잘못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검찰이 제시한 군색한 법률적 근거는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 법에 예외로 규정된 무(無)영장 계좌추적권 대상 기관을 전면 재검토, 축소해야 한다.

특히 행정부의 세무.금융감독 기관 등에 광범위하게 이같은 계좌추적권을 준 것은 법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법률 의식.지식을 갖춘 검사의 계좌추적 권한을 법관 영장에 의해서만 가능토록 규제하는 법정신을 살린다면 세무.금융감독 기관의 무영장 계좌추적권도 크게 제한해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금융감독원의 문서 수신 목록을 보면 이번 사건과 같은 서울지방검찰청의 '수사협조 의뢰' 가 여러 건 나타나 있다. 또 검찰 관계자의 해명에 따르면 이같은 방식의 편법 계좌추적이 관행으로 행해졌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검찰과 금감원은 이번 사건을 어물쩍 넘기려 하지 말고 정확하고 솔직하게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계좌 추적의 남발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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