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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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임기의 3분의1 정도를 남겨두고 있는 김대중 정부는 요즘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 그동안 불안정하게나마 정부를 받쳐왔던 DJP 공조는 마침내 붕괴됐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집권 민주당 내부의 갈등도 확산되고 있다.

***고민스러운 소수파 정권

임기 후반에 국민의 지지가 급격히 떨어지고 정부조직과 여당에 대한 대통령의 권위가 퇴색하는 것은 이번 정권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임기 후반에 소수파 정부로 되돌아갔다는 점에서 이전 정권들과는 다른 부담을 떠안게 돼 그 어려움은 한층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청와대가 내비치고 있는 현실인식과 대응전략은 우리의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DJP 연합의 해체 이후에 여야 총재회담을 준비하는 모습이 일부 보이긴 하지만 청와대는 주된 대응방향으로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 를 거론하고 있다.

아직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는 대체로 국회나 야당보다는 국민에게 직접 지지를 호소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해 가려는 구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이 현 정부의 위기 탈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 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대안일 뿐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의 장래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가 비현실적인 까닭은 현 정부가 이 시점에서 적절한 수준의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낼 만한 정치적 자원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레이건 대통령의 명비서실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제임스 베이커가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 라고 지적했던 바와 같이 국민적 지지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 잣대는 경제사정이다.

그러나 올해들어 경기가 급속하게 냉각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실생활을 통해서 겪고 있는 바다. 게다가 대북정책과 사회정책을 둘러싸고 심화돼온 시민사회의 양극화를 고려할 때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얼마나 회복할 수 있을지 지극히 의심스럽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국민을 상대로 한 정치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인식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국민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발상의 핵심은 이제 야당이 국회를 지배하게 된 상황에서 국회의 견제를 우회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고 지지를 모아보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대통령제의 근간을 이루는 행정부와 입법부간의 견제와 균형을 거북스럽게 여기고 오직 여론을 움직이는 데만 초점을 두겠다는 전략이다.

청와대 참모들이 공개적으로 반복해 이러한 전략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정치가 아직도 제도와 절차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대의민주주의의 이전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개인적 권위와 여론몰이를 통한 정치의 위험성은 심지어 제도와 절차가 깊이 뿌리내려 있는 선진 민주국가에서조차 일찍부터 경계해온 일이다. 자신이 보좌했던 닉슨 대통령의 실패를 회고하면서 헨리 키신저는 "여론에 매달린다는 것은 정책을 근시안적 전술의 차원에서만 추진한다는 것이고 이러한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국회의 견제 받아들여야

그리고 이러한 정책적 실패는 궁극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의 붕괴로 이어진다" 고 강조한 바 있다. 이 같은 키신저의 경고가 1970년대 미국의 경우에만 유효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중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김대중 정부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 현재의 어려움을 푸는 길은 지극히 평범한 원칙을 존중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대통령제 민주주의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견제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갖고 있지만 이러한 제도의 핵심은 바로 국회다.

또한 우리 국민은 지난 선거를 통해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더 많은 의석을 안겨준 바 있다. 결국 국회와의 협력과 균형이라는 상식적인 해법이야말로 오늘날 정부가 처한 어려움을 수습하는 첫 걸음이다.

청와대는 국회를 우회해 국민을 직접 상대하기에 앞서 국회를 상대로 설득하고 협력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선거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주문이었다.

장 훈 (중앙대 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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