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트 하나로 GM·크라이슬러 뚫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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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물체를 조이거나 붙이는 데 사용하는 볼트. 손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국산 볼트는 드물었다. 지금은 3500여 종의 볼트를 월 3000t가량 제작·생산하는 선일다이파스도 마찬가지였다. 끊임없는 R&D(연구개발)와 장인정신이 없었다면 이 회사 역시 영세기업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선일다이파스 일본·유럽 기업의 장인정신 배워 성장일로

볼트·너트 생산업체 선일기계(현 선일다이파스)를 이끌던 김영조(71) 창업주는 1983년 파격 선언을 했다. “너트는 외주로 돌리고 자동차용 볼트 제작에만 전념하겠다.” 매출의 40%를 차지하는 너트를 포기한다?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였다. 김 창업주의 의지는 확고했다.

“자동차 산업이 조만간 부흥할 거다. 이럴 때 선택과 집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예상은 족집게처럼 맞아떨어졌다. 1986년 선일다이파스의 볼트가 들어간 포니(현대차)·프라이드(기아차)가 미국에 수출됐다. 회사 임직원은 ‘회장의 선견지명이 통했다’며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김 창업주로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1.5%가 훌쩍 넘는 불량률이 고민거리. 장고 끝에 김 창업주는 두 번째 결단을 내렸다. 일본의 기술력과 모노즈쿠리 정신을 배우기로 결정한 것. 일본 온도 공작소와 기술제휴를 맺은 데 이어 1993년엔 미즈노 공작소와 품질향상 지도계약을 체결했다. 일본으로부터 7년여에 걸쳐 기술을 전수 받은 선일다이파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볼트 제조기술은 물론 설비를 차례로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1995년엔 현대차의 100PPM(불량률 0.01%) 인증을 받았고, 이듬해엔 QS9000을 획득했다. 품질이 향상되자 덩달아 매출이 증가했다. 1993년 224억원에서 2000년 380억원으로 1.7배가 됐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마이스터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제2의 도약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선일다이파스는 이 황금률을 잘 지켰다. 새로운 성장발판을 마련한 주인공은 김 창업주의 차남 김지훈(41) 대표. 미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김 대표는 볼트의 입고 및 완성검사 방법을 체계화하는 한편 중소기업으로선 드물게 제품 추적관리 시스템을 갖췄다.

2004년엔 유럽의 장인정신을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 기업과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선일다이파스의 불량률은 0.0009%에 불과하다. 품질만큼은 일본 기업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적 완성차 업체 GM·크라이슬러의 주요 납품업체이기도 하다. 이를 발판으로 불황에도 끄떡없는 내성(耐性)을 쌓았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 자동차 업계를 강타한 2008년에도 전년 대비 6% 늘어난 903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신성장동력 사업이 본격 추진되는 올해엔 1200억원의 매출을 기대한다.

김 대표는 “2009년 말 선박용 조향(操向) 장비업체 동영하이닉스를 M&A(인수합병)했다”며 “자동차용 볼트 전문기업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의 야심만만한 포부 밑바탕엔 ‘장인정신’이 깔려 있다.

진천=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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