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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없으면 마음은 잡초로 덮이고 세상은 캄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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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08면

유교는 오직 ‘일상’ 속에 있다. 여기 두 갈래의 위협이 있다. 1) 하나는 ‘자기-망각’이다. 일상의 관성에 매몰돼 있으면 세상이 부르는 대로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평균적 인간(das man)’이라고 불렀고, 프롬은 ‘소유’의 코드에 조종되는 ‘소외’된 삶이라고 한탄했다. 유교의 어법으로는 유속(流俗)의 삶, 인순(因循)의 쳇바퀴라고 부를 법한 것이다. 2) 이 삶이 문득 한심하고 피곤할 때 우리는 초월을 꿈꾼다. 저 너머의 종교적 위안을 찾고 이 누추한 삶을 일거에 전복시킬 혁명적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위협이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율곡의 성학집요 <7> - 삶의 기술로서의 ‘학문(學問)’

1. 일상
하나는 너무 낮고 하나는 너무 높다. 유교는 파도가 위태로운 스킬라와 카립디스의 이 두 해협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 이 지향을 정식화한 표준구가 있다. “이(理)는 기(氣)와 뒤섞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분리될 수도 없다(理氣不雜, 理氣不離).” 다른 말로 “이(理)와 기(氣)는 하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도 아니다(不一而不二)”고 표현하기도 한다. 두 명제는 형식적으로는 어불성설로 보이나 활간(活看)하면 유교의 핵심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기(氣)는 주어진 현실로, 이(理)는 가야 할 길로 잠정 이해하자. “뒤섞이지 않는다”는 말은 현실이 곧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자동인형으로 살지 말라는 독려가 “하나가 아니다”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누추한 삶을 떠나서 어디 다른 곳에 위대한 소식이, 찬란한 세계가 팔을 벌리고 있지 않다는 각오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말에 들어있다. 그렇다면? 이 삶에 주저앉지도 말고, 그렇다고 자리를 훌쩍 뜨지도 말라는 것. 이 테이블에 앉아서 솔루션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중용(中庸)』도 이 ‘망각’과 ‘초월’에의 위험을 동시 경고한 바 있다.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이유를 내 이제 알겠다. 똑똑한 사람은 저 멀리를 쳐다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발 밑에 붙잡혀 있다. 도가 밝혀지지 않는 이유를 내 이제 알겠다. 현자는 훌쩍 지나쳐 가고, 못난 사람은 저만큼 뒤처져 있다. 누구나 음식을 먹지만, 그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2. 학문
역시 유교는 종교가 되기는 어렵겠다. 초월에 기대지 않고, 오직 일상에서 의미를 완성하는 데 주력하자니 말이다. 그 길(道)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학문(學問)’이라고 부른다. 율곡은 “왜 학문인가”를 묻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세상에 태어나 사람 노릇을 하자면 공부(學問)를 해야 한다. 공부란 무슨 남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관계와 거래에서, 일을 적절히 처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일 뿐이다. 산에서 한 소식을 하거나, 세상을 지배하는 힘을 얻자고 하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안 하면, 마음은 잡초로 뒤덮이고, 세상은 캄캄해진다. 그래서 책을 읽고, 지식을 찾는다. 지식이 길을 밝혀줄 것이니, 오직 그때라야, 정신의 뿌리가 튼튼해지고, 활동이 중심(中)을 얻는다.(人生斯世, 非學問無以爲人, 所謂學問者, 亦非異常別件物事也. 只是爲父當慈, 爲子當孝, 爲臣當忠, 爲夫婦當別, 爲兄弟當友, 爲少者當敬長, 爲朋友當有信, 皆於日用動靜之間, 隨事各得其當而已, 非馳心玄妙, 希<89AC>奇效者也. 但不學之人, 心地茅塞, 識見茫昧, 故必須讀書窮理, 以明當行之路然後, 造詣得正而踐履得中矣.” (『격몽요결(擊蒙要訣)』 서(序))

이것이 유교가 정의하는 ‘학문’이다. 통념과는 매우 다르다. 지금 대학이 주도하고 있는 ‘학문’은 실용적 전망 하의 분과적 지식으로 낙착되었다. 자신의 삶과의 관계를 묻지 않아도 되는, 아니 않아야 하는 객관적 지식과 ‘정보’로 유통되고 있다. 서양도 원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하버드 대학이 설립되었을 때는 서양 고전 강좌가 교육의 중심이었고, 학생들의 삶의 태도와 품성의 형성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앤서니 크론먼, 『교육의 종말』) 그러던 것이 ‘종합대학(University)’이 설립되고 학문이 분화되면서 더 이상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인문적 성찰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 한다. 학문은 그래서 ‘연구’의 대상으로 변했고, 여기 정치적 공정성이 가치의 문제를 금기시하게 되어서 이제 ‘대학이 종말’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3. 철학
정보는 늘어나는데 여전히 삶이 혼란스럽다면? 유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만하다. 주자는 길을 “인간관계와 일상의 삶에서 마땅히 밟아야 할 선택들(道則人倫日用之間所當行者是也)”로 정의한 바 있다. 사람들이 이 ‘지식’의 가이드에 목말라 하고 있지 않을까. 실제 ‘철학’이 그 일을 해왔다. 철학은 정의 그대로 지혜의 지식(science of wisdom)이었다. 지혜란 다름 아닌 ‘삶의 기술(art of living)’을 의미했고, 동서양의 현자들은 공히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이 쾌락이 아니라 덕성이라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지금 철학은 먼 길을 걸어 최초의 지점을 잊어버린 듯하다.

인식의 과정에 대해서,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너무 집착한다. 만학의 여왕이었던 철학이 심리학과 언어학의 일을 대신하고 있어도 괜찮을까. 다시 고전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고대 작가들에 대한 연구를 인문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배우는 사람은 그것을 통해 우선 다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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