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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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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한.일 정상회담이 정한론(征韓論)의 본거지였던 가고시마(鹿兒島)에서 열린다고 옳으니 그르니 말이 많다. 시각을 조금 바꾸어보자. 가고시마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 아버지 고이즈미 준야(純也)의 고향이다. 대대로 가고시마에서 살다 준야가 외할아버지 마다지로(又次郞)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도쿄로 옮겼고 거기서 고이즈미가 태어났다. 성도 외가를 따라 고이즈미가 됐다. 가고시마가 정상회담 장소가 된 데는 "고향으로 모신다"는 고이즈미의 생각이 깔려 있다.

외교부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는 회담 후보지 선정 회의에 직접 참석해 가고시마의 그 많은 온천 가운데 이부스케를 직접 골랐다. 서양 정상들은 사우나에서 그야말로 '훌렁 벗고' 스킨십 외교를 펴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동양에선 어색하다. 그래서 모래찜 온천인 이부스케를 골랐다는 것이다.

벗을 필요 없이 가운 차림으로 누워 모래 속에서 땀을 흘리면 같이 온천을 했다는 친밀감을 충분히 준다. 이부스케가 공항에서 꽤 떨어져 있는데 고이즈미 총리가 "여기서 내가 맞는 게 좋겠다"며 일일이 챙긴다고 한다. '친구처럼 맞는다'는 컨셉트에 화답해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와 진짜 친구가 된다면 이웃 나라 사이에 무척 좋은 일이다.

'격의 없는 친구 맞기'식 정상회담으로 유명한 곳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크로퍼드 목장이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중국의 장쩌민 전 국가주석,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고이즈미 총리 등 힘 쓰는 나라의 정상들이 두루 초청받아 개인적 친분을 쌓았다. '크로퍼드 우정'이 최고급 외교 자산이란 건 외교가의 상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1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과 미국은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했다. 그런데 친분을 중시하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목장 초대를 못 받았으니 국가차원에선 몰라도 두 사람을 친구 사이라 하긴 곤란해 보인다.

그 점에서 국제위기감시단(ICG) 한국 지부 피터 벡 국장의 충고가 눈에 띈다. 그는 "미국을 움직이려면 부시 대통령과 개인적 관계를 맺으라"면서 "오는 20일 한.미 정상회담 때 부시에게서 별명을 하나 얻으라"고 했다. 가까운 친구가 되란 것이다. 북핵 같은 문제에 막강파워를 발휘하는 미국 대통령이나 경제강국 일본의 총리와 '어려운 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고 그래서 국익만 늘어난다면 '친미한다, 친일한다'는 식의 비판은 흘려들어도 된다.

정치부 안성규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