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니즘 규탄에 미국·이스라엘 더반회의 철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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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인종적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국제회의가 인종적 마찰을 표면화하는 역효과를 낳으며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리고 있는 제3차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WCAR)에서 이스라엘의 시오니즘을 규탄하는 내용이 담긴 대회선언문 초안을 놓고 아랍권과 서방이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 대표단이 회의장을 떠나버린 것이다.

◇ 대표단 철수=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3일 "대표단에 본국으로 귀환하라고 지시했다" 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번 회의에서 증오에 가득찬 문구를 선언문에 담아 이스라엘을 인종차별 국가로 비난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고 이유를 설명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도 이날 "이번 회의는 한편의 희극" 이라고 비난하면서 선언문 초안에 반(反)이스라엘, 반(反)유대 문구가 포함돼 대표단을 철수시킨다고 밝혔다.

미국 대표단측은 호주 등 일부 국가도 철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갈등의 배경=대표단 철수 사태의 직접적 계기는 선언문 초안에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문구가 담긴 것이었다. 이집트.시리아 등 아랍권 국가들의 주도로 작성된 초안에는 "시오니즘의 인종차별적 관행이 확산하고 있는 것을 심히 우려한다"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피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적 관행에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이스라엘이 이 초안에 반발하자 노르웨이와 캐나다 대표단이 아랍권과 이스라엘을 중재하며 초안 재작성을 추진했다. 미국도 이 협의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돌연 미국과 이스라엘이 회의장에서 걸어나왔다. 협상은 순로롭지 않았으나 선언문 채택까지는 나흘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랍권 국가들과 일부 국제 인권단체들은 이번 미국의 결정은 회의 참가 전부터 계획됐던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1978년과 83년에 열린 1, 2차 회의에 불참한 미국은 이번 회의에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국무장관이 된 파월을 참석시키지 않고 톰 랜토스 민주당 하원의원을 대표로 하는 중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또 이번 회의에는 노예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문제가 논의될 예정이어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난처한 입장이었다.

◇ 향후 파장=유럽연합(EU) 대표단과 남아공의 주도로 선언문 초안이 재작성되며 서방과 아랍권의 갈등이 봉합되고 있지만 본래 취지가 무색케 돼 18년 만에 이뤄진 회의가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게 됐다.

미국은 아프리카 및 아랍 국가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대표단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외교적 지위와 외교노선에 손상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가 연례인권보고서.종교자유보고서.인신매매보고서를 내며 타국의 인권문제에 관여해 온 것에 불만을 품어온 나라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노골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 미국 내에서도 공화당 정권이 인종차별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을 사게 됐다.

이상언 기자

◇ 시오니즘(Zionism)=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의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한 민족주의 운동. 고대 예루살렘의 중심부 시온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1948년 독립국가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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