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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간암 투병 최하림 시인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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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간암 투병 중이던 시인 최하림(사진)씨가 22일 오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별세했다. 71세.

두 달 전인 2월 초순, 장석남·김원 등 최씨가 교편을 잡았던 서울예대 출신 제자 시인과 후배 시인 20여 명은 최씨 자택에서 가까운 경기도 문호리 ‘갤러리 서종’에서 『최하림 시전집』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쾌유도 비는 조촐한 자리였다. 위의 글 은 전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두 달 전의 덤덤한 고백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예언이기라도 한 것처럼, 시인은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다. 시인은 1939년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한 다방에서 평론가 김현을 만난 게 계기가 돼 63년 김승옥·김치수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냈다. 이 동인지는 훗날 계간지 ‘문학과 지성’으로 발전한다. 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이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최씨는 한때 역사의식과 예술의식 사이의 균형을 진지하게 모색했다. 장석남 시인은 “선생님이 70년대 초부터 10여 년간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다”고 했다. 시대에 대한 고민 탓이다. ‘이 도시의 보이지 않는/눈이 나를 보고 있다’로 시작하는 최씨의 시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에 대해 김현은 “광주 시의 백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뇌졸중·간암 등의 발병과 함께 남한강변으로 이사 와서는 관조적이고 편안한 시풍으로 바뀌었다.

정작 최씨를 아는 이들은 “시 세계보다 삶 자체가 귀감이 되신 분”이라고 말한다. 김원 시인은 “삿된 욕망 없이 담백하셨다”고 말했다.

최씨는 2005년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까지 일곱 권의 시집을 냈고 이산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문 최우수상 등을 받았다. 유족은 부인 장숙희씨, 아들 승집(제일모직 연구실 차장)씨, 딸 유정(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부사장)·승린씨 등이 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발인 24일 오전 5시. 02-2258-5957.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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