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벌거벗은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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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벌거벗은 대통령 사진이 프랑스에서 화제라고 한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지중해변 전용 별장에서 올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잠깐 알몸으로 발코니를 어슬렁거린 일이 있는데 용케도 그 장면을 파파라치의 망원렌즈가 잡았다는 것이다.

후환이 두렵기도 하고 국가원수의 체면도 생각해 프랑스 언론은 일단 묻어둘 모양이지만 혹시 필름이 외국 신문이나 잡지 손에 넘어갈까봐 대통령궁 관계자들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고 한다. '물건' 이 된다 싶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카메라를 디밀고 설쳐대는 파파라치의 극성도 이 정도면 도가 좀 지나친 것 같다.

악명 높은 파파라치야 그렇다 치고, 과감하게 알몸을 드러낸 시라크 대통령도 연구대상이다. "나의 잠옷은 '샤넬 넘버5' (프랑스제 향수 이름)" 라고 당당하게 밝혔던 마릴린 먼로처럼 알몸이 아니면 잠을 못 이루는 서양사람이 많다는데 혹시 시라크 대통령이 그런 부류에 속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면 여름이면 지중해의 파란 햇살을 찾아 몰려드는 나체주의자들 흉내라도 불현듯 내보고 싶었던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요구하는 권위와 격식의 옷을 모처럼 훌훌 벗어던지고 가장 편한 자연의 옷차림으로 마음껏 휴가를 즐겨보고 싶었던 것일까.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에서 백성들로부터 찬사 듣기 좋아하는 임금님은 정직한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특별한 옷을 만들어 주겠다는 사기꾼들의 말에 속아 벌거숭이가 돼 백성들 앞에 자랑스럽게 옥체를 드러낸다.

신하들은 정직하지 않다고 낙인 찍히는 게 두렵고 혼자서 튄다는 소리를 듣는 게 걱정되기도 해 입을 모아 임금님의 '화려한' 의상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백성들도 따라서 환호하지만 겁을 모르는 아이들만 "임금님은 벌거숭이" 라고 놀려댔을 뿐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 에서 리어왕은 "뽐내듯 입고 있는 이 옷가지들을 벗겨 버리면 인간은 누구나 가련한 벌거숭이의 두다리 동물에 불과하다" 면서 단추를 풀어달라고 부탁한다.

옷을 벗으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나체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벌거벗은 대통령 사진을 묻어두기로 한 프랑스 언론의 처사가 못마땅할지 모르겠다. 대통령이 입고 있는 옷이 대중의 인기만 좇다 사기꾼과 아첨꾼들의 달콤한 교언(巧言)에 넘어가는 임금님이 입고 있는 거짓과 허영의 옷이라면 그 옷은 몽땅 벗어도 좋을 것 같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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