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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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2장 신라명신

또한 분명하게 밝혀진 것이다.

신라사부로의 아버지 요리요시는 평소에 이 신당에 모셔져 있던 신라명신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아들 요시미쓰가 13살이 되어 성인식을 올릴 때 이곳에서 거행했을 리가 없으며 또한 이름을 신라사부로로 개명할 리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두 이곳 일대에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의 후예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당에 안치되어 있는 신라명신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사연을 지닌 신상인 것일까.

안내판은 그 신라명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곳에 모셔진)신라명신은 원성사의 개조인 지증대사의 수호신으로서 본존인 신라명신 좌상 역시 국보이다…. "

지증대사.

그는 이 미데라의 초대 지주였던 엔친(圓珍)을 말한다. 그는 814년에 태어나 891년에 죽은 천태종문(天台宗門)의 오대 좌주(座主)인 것이다. 그는 853년에 신라무역상 흠량휘(欽良暉)의 선편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5년 동안 공부한 후 858년에 귀국한다. 귀국할 때 엔친은 경전을 4백41권이나 갖고 돌아왔으며, 돌아온 즉시 이 미데라에 경전들을 봉안하고 초대 장리(長吏)로 취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당에 모셔진 신라명신은 지증대사와 어떤 인연이 있길래 그의 수호신이 되었던 것일까. 부처를 모시는 승려라면 마땅히 석가모니야말로 자신의 주불이며 수호신이 아닐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증대사는 어째서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신라명신을 자신의 본존으로 모시고 수호신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러나 내 추적은 그것으로 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만추의 햇살이 순식간에 스러지고 곧 어둠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신당이었으므로 외등조차 없어 주위는 삽시간에 캄캄해졌다.

조금이라도 빛이 있으면 나는 울타리를 뛰어 넘어들어가 신당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안치되어 있을 신라명신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도망치듯 캄캄한 샛길을 따라 걸어내려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 가을 내가 찾아갔었던 첫번째 여행이었던 것이었다.

첫번째 여행에서 전혀 뜻밖에 미데라와 신라사부로에 얽힌 비밀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내 역사의 추적은 또 다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즉 신라사부로의 아버지 요리요시는 어째서 셋째 아들의 성인식을 신라명신 앞에서 올리고 아들의 이름을 신라사부로라고 바꿀 만큼 신라명신을 숭상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뿐 아니라 미데라의 개조인 지증대사 역시 신라명신을 자신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 안내문에 적혀 있던 내용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그 신라명신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궁금증은 한국으로 돌아와 미데라의 매표소에서 샀던 책을 읽어보는 동안 더욱 깊어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책 속의 '원성사 용화회연기(園城寺 龍華會緣記)' 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내용이 들어있다.

"지증대사는 858년 6월 당나라에서 발해국 상인 이연효(李延孝)의 선편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오는 도중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 직전에 이른다. 무사하게 해달라고 배위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대사의 앞에 갑자기 노옹(老翁)하나가 나타나서 말한다.

'내 이름은 신라명신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대의 불법을 호지(護持)해 줄 것이며 그대가 가져가는 경전 또한 보호해줄 것이다. 그 대신 내가 점지해준 오미(近江)국 시가(滋賀)군 원성사에 절을 짓고, 그 절에 불경들을 안치하도록 하라. '

말을 끝낸 노옹은 홀연히 사라지고 그 순간 폭풍은 멎고 바다는 잠잠해졌다. 이로써 지증대사는 무사히 귀국하게 되었으며 신라명신이 시킨 대로 오토모씨들의 씨사인 원성사 절터에 주석하는 한편 자신이 만났던 신라명신을 모시는 신당을 건립하고 그 신당 속에 명신을 봉안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신라명신은 지증대사의 수호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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