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부부 상담캠프 1박2일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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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때렸다가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제 자신이 비참하게 느껴져요."

"남편을 용서하라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되겠어요? 수십년을 맞고 살았는데…(흐느낌)."

*** 이혼위기 부부 10쌍 참가

14일 오전 서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 소담실. 어색한 표정의 부부 10쌍이 서로 고개를 돌린 채 앉아 있었다. 이들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소장 곽배희)가 13, 14일 1박2일 과정으로 마련한 '나, 너, 그리고 우리 행복찾기 부부캠프' 참가자. 가정폭력 때문에 경찰이 달려오고 급기야 검찰에까지 불려갔다 상담을 받는 조건으로 기소유예된 가해자 남편들과 피해자인 아내들이다.

가정이 깨질 뻔한 심각한 위기에 처했던 부부인 만큼 캠프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전날 부부상담 전문가 우애령 박사가 '용서하기 열 가지 방법' 등을 알려줬지만 한 아내는 밤새 화가 솟구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내 좀 때렸다고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느냐"며 화를 내며 집으로 갔던 또 다른 남편은 새벽에 캠프장으로 슬그머니 돌아왔다.

둘째날 강사인 이서원(사회복지학)박사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서로 안마도 해주고 손도 잡아보라고 권유하자 마지못해 시늉을 하던 부부도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 박사가 서로 기억에 남는 선물을 얘기해 보라며 대화를 유도했다.

"나는 남편이 길거리 좌판에서 사다 준 싸구려 귀걸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내 아내는 돈만 좋아한다고 생각했어요. 싸구려 귀걸이를 꼽을 줄은 진짜 몰랐습니다."

참가한 아내들이 "남자들은 저렇게 아내 마음을 모른다"며 이구동성으로 말하자 남편들은 서로 마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밉네 곱네 하면서도 이제까지 저를 따라 열심히 살아온 아내가 진짜 고마워요. 이런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강의가 끝나갈 즈음 서로 고맙다는 말을 해보라는 강사의 권유에 참가자 김모씨는 "장사해야 한다며 새벽같이 캠프장을 떠난 아내에게 진짜 미안하다"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김씨는 "추운 길바닥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아내에게 주려고 두툼한 바지를 사서 줬더니 '이런 걸 왜 사왔느냐'며 아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며 "그래도 잘못은 내가 했으니 더 잘해야지"라고 말하며 잠시 목이 메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말없이 박수로 그를 격려해줬다.

*** 말문 열리자 울먹인 남편

한 아내는 "화가 나면 술을 마시고 남편에게 시비를 거는 바람에 남편이 주먹을 휘둘렀는데 이젠 그렇게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또 다른 아내는 "내가 용서한다고 가정의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남편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했다.

14일 오후 2시. 캠프장을 나서며 아내의 어깨 위로 손을 돌려감은 남편이 눈에 띄고 아내의 가방을 들어주는 남편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어색함과 감정의 응어리를 풀지 못한 채 뚝 떨어져 걸어가는 부부도 있었다.

"아내는 용서를,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라고 당부하면 참가자들이 금방 수긍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담 경험을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용서와 이해라는 말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부부가 많습니다."

이 박사는 "대화할 줄 모르는 부부가 너무 많아 문제가 생긴다"며 "상담을 받은 가정의 70%는 폭력이 재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끝내 응어리 못푼 부부도

이 캠프를 주관한 가정법률상담소의 박소현 상담위원은 "캠프에 참가한 부부를 보며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말이 생각났다"며 "가정폭력처럼 심각한 문제가 없는 부부도 결혼 생활 중간에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비롯해 전국 89개 가정폭력상담소는 가정폭력의 피해자.가해자인 부부들을 위해 6개월 과정으로 60시간의 상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올 한 해 동안 34억원의 복권기금을 지원받아 무료로 실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참가한 사람은 전국에서 9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개별 상담부터 음주문제 상담, 집단 상담, 교육강좌, 그리고 부부 캠프까지 6단계로 구성된 강의를 받고 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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