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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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62. 그 아버지에 그 딸

아버지 성철스님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딸 수경(불필스님)이 이후 어떻게 불교에 빠져들었는가를 듣다보면 '그 아버지에 그 딸' 이란 생각이 절로 난다.

당시 경남 일대 영재들만 입학하던 진주사범에 입학한 수경은 틈만 나면 화두(삼서근)를 들었다. 교생 실습을 위해 진주 인근 초등학교로 출근해야 하는데, 학교로 가는 대신 월명암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부산사범을 졸업하고 수행차 머물고 있던 이옥자(백졸스님.부산 옥천사 주지)를 만났다.

성철스님의 출가 이후 20년 만에 다시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재원(才媛)' 이란 소리 들어가며 교사의 길을 잘 걸어가던 처녀가 교사발령을 받고서도 "부임하지 않겠다" "참선 공부하러 절에 가겠다" 고 하니 집안 어른들의 야단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버지 성철스님이 그랬듯이 딸 수경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족회의가 열렸다. 어른들의 설득에 수경이 조건을 내세웠다.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으면 절에 안가겠습니다. "

모두들 긴장하며 수경을 쳐다봤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내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

어른들이 모두 침묵했다. "출가 않으면 죽을 팔자" 라며 출가했던 아버지 성철스님의 단호한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수경이 용기를 내 결론을 내렸다.

"부처님은 6년 만에 대도를 깨쳤다 하지만, 나는 더 열심히 해서 3년 만에 공부를 마치고 도를 깨치고 오겠습니다. "

여든을 바라보는 한평생 꼿꼿하고 도도하게 살아온 할아버지가 눈물까지 흘리며 한탄했다.

"우리 집안 다 망한데이. "

이 무렵, 이런 집안의 사정을 알 바 없는 성철스님은 경남 통영 안정사 옆 천제굴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대구 팔공산 파계사의 산내 암자인 성전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출가를 결심한 수경은 가족들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소문 끝에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참선 공부를 하러 가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

딸의 출가결심을 듣던 성철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급할수록 둘러가야 한데이. "

성철스님은 딸의 뜨거운 구도열이 급하게 보였던 듯하다. 그러나 구도의 결심을 굳힌 수경은 아버지의 자상한 조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수경은 친구 옥자와 함께 성철스님의 지시에 따라 해인사 청량사에서 하안거(夏安居.여름 한철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 참선에 전념하는 일)를 처음 맞았다. 전쟁과 불교계내부 정화(淨化.비구, 대처스님 간의 정통성 다툼)운동 직후라 사찰은 낡아 볼품이 없었다.

수경과 옥자는 삭발을 하지 않고 '단발머리 행자' 로 열심히 정진했다고 한다. 굳이 묵언(默言.하루 종일 말하지 않고 지냄)을 다짐하지 않았지만 정진에 전념하느라 자연히 묵언의 생활을 했다. "두 번 눕지 말자" 고도 다짐했다.

잠깐 누웠다가 눈을 뜨면 더 이상 자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밤이면 대웅전 앞 마당을 거닐기도 하고, 거닐다가 다리가 아프면 기둥 모퉁이에 기대 잠깐 쉬기도 했다. 불필스님은 지금도 그 시절의 초발심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시절 상식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엄한 생활을 했지. 처음엔 금방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거짓말처럼 온몸이 가뿐해지더군요.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면 절대로 피로나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

그러나 어떤 일이든 쉽기만한 것은 없다. 하물며 깨달음의 길임에랴. 해제(解制.안거를 마치는 것)무렵이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급기야 상기병(上氣病.기가 머리위로 치솟아 생기는 두통)에 걸려버렸다. 두통에 시달리다가 해제를 하자마자 성전암으로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그래서 내가 급할수록 둘러가라 안그랬나. "

성철스님은 상기를 내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좌복에 앉아 기운을 발바닥 가운데로 끌어내리는 수행을 반복하는 식이다. 그대로 열심히 따라하다 보니 열이 내리기 시작하고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 나아질 즈음 성철스님이 다음 수행처를 정해줬다.

"태백산 홍제사에 인홍(仁弘.전 석남사 주지)스님을 찾아가거라. "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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