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마루사건 일본 배상 유족들 환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평생 한(恨)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제야 아버지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됐습니다. "

1945년 우키시마마루(浮島丸)사건으로 어머니와 누나.여동생 등 일가족 세명을 잃고 아버지와 함께 극적으로 살아 남은 장영도(68.광주시 동구 학동)씨는 "뒤늦게나마 일부라도 보상을 받게 돼 다행" 이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장씨는 그러나 "사건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점에 대해선 분노한다" 고 말했다.

56년 전 징용.징병자 등을 태우고 귀국하다 일본의 마이즈루(舞鶴)항 입항 과정에서 폭발.침몰한 우키시마마루 사건에 대해 23일 일본 교토법원이 생존자들의 피해와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생존자.유족들은 크게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날 소송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회장 李金珠.81)에는 李회장 아들(金忠吉.60)부부가 유족 등에게서 잇따라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희생자 손해배상 소송을 위한 후원회 장두석(62)회장은 "패전 후 한국행을 두려워한 일본인 승무원이 고의로 폭파했다는 우리측 주장을 법원이 기뢰폭발로 결론지은 것은 유감" 이라며 "돈이 문제가 아니라 진상규명이 목적이었는데 사망자 수도 밝혀내지 못했다" 고 말했다.

유족들은 또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족에 대한 배상요구를 기각한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일본 정부에 대한 공식사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감" 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인 '아시안 블루' 를 제작해 23, 24일 광주.서울에서 상영 중인 이토 마사아키(伊藤正昭.69)교토 시네마워크 대표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한.일 양국에서 유가족 돕기가 공론화하기를 바란다" 고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68년 아키모토 료지(秋元良治)등 일본인들이 중심이 돼 모임을 만들고 사건의 배경과 진상을 추적하면서 시작됐다. 일본 시민단체들은 78년 이 배가 침몰한 장소인 마이즈루(舞鶴)만 해안에 추모비도 세웠다. 그 뒤 이 사건은 김찬정(金贊汀.63.재일교포 2세.자유기고가)씨가 사건현장을 답사한 뒤 84년 발간한 『우키시마마루는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았다』를 통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광주지회는 92년 우키시마마루 유족 등 56명이 원고가 돼 일본 교토지방법원에 손해배상 및 사죄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국내에서의 진상규명 활동은 반핵운동가인 전재진(田在鎭.44)씨가 일본에서 열린 반핵대회에 참석했다가 이 사건의 경위를 전해들으면서 본격화했다.

95년 '우키시마마루 폭침진상규명회' 를 만든 田씨는 10여명의 회원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어 20여차례 강제징용 현장을 방문해 징용자들의 의식주 실태.승선자 신원 조사 등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다.

승선자 중 생존자 1백여명을 찾아내 증언을 확보하는가 하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청원서 등을 청와대.외교부 등 관계기관에 보내고 일본 총리와 주한 일본대사관에 관련 자료 제공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田씨는 96년 8월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열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손해배상소송 원고단에 생존자 24명을 추가시켰다.

조한필.천창환 기자, 도쿄=남윤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