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 화제 영화 '무사' 사실감 넘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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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처음부터 지향점이 높았다. 한국 영화 붐을 타고 모아진 영화계의 기대도 사상 최고였다. 그러나 머리 속으로 그리는 기대에 작품으로 보답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법이다.

'무사(武士)' 는 평론가나 관객들에게서찬사를 끌어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밟지 못한 영역을 활보했다는 점에선 한국 영화의 진일보를 얘기해도 좋을 듯하다.

70억원이란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제작비, 5개월간 중국 대륙 1만㎞ 횡단, 무협 액션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채택한 시네마스코프 화면,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겔리온' 을 작곡한 일본 영화 음악의 간판 사가스 시로 기용 등 '무사' 에는 요즘 보기 힘든 실험이 많다.

여기에 안성기.정우성.주진모와 '와호장룡' 의 장쯔이 등 스타 군단까지 가세했다. 제작비는 한국에서 댔지만 '패왕별희' '와호장룡' 을 만든 중국 미술팀, 일본 작곡가의 영입 등 영화의 구석구석을 보면 한.중.일 합작영화라 불러도 무리가 아니다.

원(元).명(明) 교체기인 1375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간첩으로 몰려 귀양길에 오른 고려의 무사들. 귀양지로 향하던 중 원나라 기병의 습격으로 명군은 몰살당하고 고려인들은 사막에 고립된다.

장수 최정(주진모)은 독단적으로 고려로 돌아갈 것을 결정하고 사막을 횡단하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딸 부용 공주(장쯔이)를 납치한 원의 기병과 다시 마주친다. 부용 공주가 피로 쓴 '구(救)' 라는 메시지를 받은 최정은 원의 기병을 습격해 그녀를 구출한 뒤 창술의 달인 여솔(정우성)과 활쏘기 명수 진립(안성기)등과 난징으로 향한다.

러셀 크로의 '글래디에이터' 를 무색케 할 만한 박진감 넘치는 무협 액션은 촬영.연기.연출, 그리고 화면 색처리에서 상당한 경지를 보인다. 광활한 풍경을 그대로 살리고 배경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위해 보통 화면보다 가로가 30% 긴 시네마스코프 방식을 채택한 이 영화는 사실적인 면이 특히 돋보인다. 팔.다리를 가차없이 자르는 무사들의 거침 없음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들의 생존에 대한 본능이 화면에 꿈틀대기 때문이다.

아홉 무사들이 사막.계곡.성(城)을 넘나들며 펼치는 로드 무비의 성격을 지닌 액션은 허름한 창고를 배경으로 몇 명이 식칼을 휘두르는 정도였던 기존의 액션영화와는 뚜렷이 차별된다.

'사자의 눈을 가진' 노비 여솔 역의 정우성은 말을 타고 사막을 질주하면서 긴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달라진 모습으로 눈길을 끌고, 활을 겨눈 채 숲 속을 헤치는 안성기의 연기 또한 쉽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특히 혈기 왕성한 정우성과 주진모 두 배우 사이에서 완급을 조절하면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안성기의 연기에선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대신 무사의 명예와 사랑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주진모, 기대만큼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 장쯔이가 아쉽다.

'비트' '태양은 없다' 에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 김성수 감독은 "왕조의 역사에서 티끌처럼 미미하게 다뤄졌지만 역경을 딛고 나라와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인간상에 대한 관심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황한 액션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 아홉 무사가 엮어내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이 영화의 흠으로 남는다.

설정은 근사하지만 너무 많은 인물과 상황을 안고 가야 하는 부담이 컸다. 왜 그들이 고난의 길을 자초하는가에 대한 당위성과 두 주인공이 부용 공주에 애정을 느끼는 이유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영시간은 2시간40분. 그러나 1차 편집을 끝낸 상태에서는 4시간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시간이라면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생생히 살아날지도 모르겠지만…. 필름을 자르면서 김감독은 아마 자신의 욕심이 지나쳤구나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9월 7일 개봉.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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