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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슈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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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다음 달 6일 총선을 앞둔 영국. 13년 만의 정권교체를 노리는 보수당은 인상적인 포스터를 내걸었다. 큰 구둣발 밑에서 보일락 말락한 새싹이 떨고 있는 그림이다. 구둣발의 정체는 세금과 빚이요, 새싹은 경제 회복의 신호다. 집권 노동당의 재정 확대 정책이 막 살아나는 경제를 깔아뭉갤 것이란 메시지다.

가냘픈 새싹은 보수당과 인연이 있다. 경제적 의미로는 최초로 보수당 인사가 이 말을 썼기 때문이다. 1992년 4월 총선 길목에서 집권 보수당은 패색이 짙었다. 91년 가을부터 당시 재무장관 노먼 러몬트는 이런 말로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경제 회복의 그린슈트가 돋아나고 있다.”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보수당은 예상을 뒤엎고 승리했다.

그러나 낙관론에 안주한 보수당은 그해 9월 치욕을 맛본다.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화를 무차별 공격했고, 문제 없다던 영국 정부는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러몬트 장관은 사임한다. 기자들은 불행의 씨앗이 된 그린슈트 발언을 후회하는지 물었다. 그는 프랑스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제목으로 답변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Je ne regrette rien)”.

이 장면은 여러 코미디의 소재가 됐다. 일부 이코노미스트들은 “장관의 퇴임 소식이 바로 경제의 새싹”이라고 고소해했다. 소담스러운 열매를 고대하던 유권자들은 보수당에서 등을 돌렸다. 당 개혁에 매진한 노동당은 97년에 집권해 지금까지 정권을 잡고 있다.

그린슈트란 말이 재등장한 것은 지난해부터다.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그린슈트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고 밝히면서다. ‘비관론의 대왕’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직격탄을 날렸다. “그건 그린슈트가 아니라 ‘옐로위즈(yellow weeds, 싹수가 노란 잡초)’다.”

멋진 말이었으나 늘 뒤끝이 텁텁했던 그린슈트. 이달 초 취임해 시장의 이목을 받는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16일 그걸 다시 끄집어냈다. “최근 미국에서 그린슈트의 신호가 나오고 있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속뜻은 세계경제의 싹이 이제야 돋기 시작했으니 ‘저금리’ 온상에서 좀 더 길러야 한다는 뜻은 아닐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단연코 아닐 텐데, 그 깊은 뜻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