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후보작] 고재종 '방죽가에서 느릿느릿'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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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고재종씨의 시를 읽으면 무언가가 하늘로 튀어오르는 탄력을 느낀다. 그것은 시의 호흡과 율조에서도 감지되며 그 안에 담긴 정신의 영역에서도 포착된다.

좌절의 체험을 노래하는 경우에도 사라진 표층 밑에 면면히 이어지는 생명의 지속성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생명의 터전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굳은 결의를 잃지 않는다. 그의 시어 사전에 절망이란 말은 없다. 바로 이것이 고씨의 시가 지닌 커다란 미덕의 하나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자연은 그의 삶이 뿌리박고 있는 농촌의 생활 공간 속에 그대로 존재하는 대상이다. 거기에는 어떤 윤색도 장식도 없다. 그러나 그 시의 자연 묘사는 다른 어떤 시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의 한 극치를 그려낸다. 또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러면서도 그 인물들은 척박한 삶 속에서도 우리가 온 몸으로 껴안아야 할 고귀한 가치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아름답고 천진한 농촌 풍광을 그려내는 시인의 말씨는 진솔하고 꾸밈이 없다. 여기에는 시를 멋지게 써보겠다는 작위적 기법에 대한 선망이 없으며 기이한 시구로 대중의 호기심을 끌어보려는 헛된 욕망도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자기가 본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진실성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고심하며 형상화의 감도를 최대로 높이려는 시인의 전심어린 노력이 보일 뿐이다.

그의 초기시는 농민의 울분을 토로한다든가, 소외된 농촌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네 번째 시집 『날랜 사랑』 이후 그의 시세계는 중요한 전환을 이룬다. 농촌이라는 공간을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고 화합을 이루는 커다란 생명 공동체로 보고, 거기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명의 움직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율동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혹한을 이겨내며 면면히 생명을 이어가는 농촌 생명체의 관찰에서 촉발된 그의 생명의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져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이 고리처럼 연쇄돼 있고 상호간의 영향과 작용에 의해 생명의 존재성이 확인된다는 사실의 발견에 이른다. 그의 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 농촌이라는 한정된 울타리를 벗어나 생명들이 화합을 이루는 우주적 자연공간으로 확대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한국 농촌이라는 풍토적 고유성을 점착력 있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관념적인 차원으로 이탈하지 않는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갈수록 둔감해져가는 우리들의 시야를 시원하게 터주는가 하면, 성장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황폐해져가는 우리들 삶의 터전을 되돌아보고 생명의 올바른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반성적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결코 우리에게 어떤 인식과 성찰을 강요하지 않는다. '연비(聯臂)' ( '시안' 2000년 가을)나 '청대밭으로 가리' ( '애지' 2001년 봄) 등 최근의 작품은 비밀스러운 사랑의 감정이라든가 오염된 세계에서 자신의 뜻을 지키려는 개결의 정신을 노래하면서도 결코 그 감정과 정신을 우리의 마음 속에 억지로 밀어넣지 않고 지극히 자유로운 독백의 어조 속에 방임해 둠으로써 독자의 자발적 진입을 묵묵히 기다리는 대단한 견인(堅忍)의 자세를 유지한다.

이것이 그의 시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숭원 <문학평론가.서울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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