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개화와 근대화 … 유길준 ‘청년 정신’ 숨쉬는 미국 속 한국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2호 31면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1층 정문 맞은편에 있는 ‘유길준 전시실’. 전통 한옥 모형이 한가운데에 배치돼 있다. 박물관 내부에선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 제공]

보스턴은 1636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보스턴 라틴스쿨’과 50여 개의 대학이 모여 있는 교육문화의 중심지다. 그래서인지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에게 정서적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더구나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던 유길준(兪吉濬·1856∼1914)이 향학열을 불태운 곳이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34> ‘피바디 에섹스’박물관

보스턴에선 미국 독립전쟁의 첫 총성이 울려 퍼졌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을 도화선으로 1775년 보스턴 인근 렉싱턴·콩코드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수많은 동상과 유적지, 주민들의 독특한 영어 악센트는 보스턴의 강한 자부심을 말해준다. 역사의 굴곡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스턴을 가로지르는 찰스 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필자는 먼저 찰스 강 바로 남쪽의 밴덤 호텔을 찾아갔다. 일본어 통역을 위해 보빙사(報聘使:방미 사절단)를 수행하고 보스턴에 도착한 유길준이 투숙한 곳이다. 1871년 세워진 뒤 네 차례나 화재가 발생해 지금은 콘도미니엄으로 탈바꿈했다.

<1>한국에 귀국한 뒤 중년 시절의 유길준. <2>미국에 간 보빙사 일행. 정사인 민영익(앞줄 왼쪽)과 수행원 홍영식(앞줄 오른쪽)·유길준(뒷줄 오른쪽 둘째)이 보인다. <3>유길준이 쓴 『서유견문』의 표지. <4>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의 외부 전경. [중앙포토, 고재방 제공]

‘한국 전시관’과 별도로 ‘유길준 전시실’ 설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는 보빙사 일행은 미국에 도착한 최초의 한국인들이었다. 1883년 9월 이들은 뉴욕의 피프스 애비뉴 호텔에서 체스터 아서 대통령(제21대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다음 보스턴으로 왔다. 신임장 제정식 때는 민영익의 지시로 접견실 바닥에 엎드려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했다. 조선의 예법에 따라 최고의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보스턴에서 보빙사 일행과 헤어져 홀로 남은 유길준의 발자취를 따라 북쪽으로 24㎞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세일럼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마녀재판을 실시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홍글자』를 쓴 너대니얼 호손이 태어난 고장이다.

세일럼에 도착하자마자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을 찾아갔다. 1799년 설립돼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에섹스 거리에 있는 28개 동(棟)의 옛 건축물로 이루어졌다. 동양에서 건너온 도자기, 상아 공예품, 은제품, 비단 등 귀중한 예술품들이 전시돼 있다.

현대식 건축 양식의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가면 1층 입구 맞은편에 ‘한국 전시관’이 있다. 2003년 9월엔 330㎡ 규모의 ‘유길준 전시실’이 따로 만들어졌는데 미 역사상 한국 사람의 이름을 딴 최초의 전시실이라고 한다. 전시실에는 1884∼97년 사이에 유길준과 에드워드 모스 교수가 주고받은 20여 통의 영문 편지, 유길준이 모스에게 선물로 준 부채·관복·한복·갓·망건·토시 등 70여 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서 한국전시관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수전 빈씨는 “이것들을 보면 개화에 대한 그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고 19세기 개화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며 “박물관으로선 대단히 소중한 자료들”이라고 말했다.

박물관에서 500m 떨어진 곳에는 유길준이 하숙했던 집이 있다. 원래는 큰 도로변의 모퉁이에 있었는데 지금은 멋진 콘도미니엄이 들어서 있었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이 독일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대화해 20세기 초 몰려온 독일·폴란드 출신 이민자들의 후손이 아닌가 싶었다. 하숙집에서 1㎞ 떨어진 곳에 있었던 모스 교수의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지 않은 데다 집 자체도 이웃 주택에 비해 초라하게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발길을 돌려 세일럼에서 북쪽으로 30㎞ 떨어진 조용한 전원도시 바이필드에 있는 거버너 덤머 아카데미(고등학교)로 향했다. 이 학교는 1763년 설립됐다. 유길준이 입학하던 당시에는 모든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숙학교였다.
학교 도서관 앞에 서 있는 유길준 기념비에는 ‘한국의 사회개혁가, 정치가, 교육가, 저술가였다’고 소개돼 있다. 둘째 아들 억겸은 유길준이 학교 다닐 때 쓰던 책상에서 한자 낙서를 보았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그 책상을 찾아볼 수 없다. 존 더거트 교장은 “한국의 개화사상가이며 수필가인 유길준이 우리 학교에서 공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활짝 웃었다. 학교 안내 책자에도 유길준에 대한 소개가 큼직하게 실려 있다. 한국과 100여 년의 인연을 지닌 이 학교에서 수십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유길준을 모델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학교엔 유길준 기념비, 안내 책자에도 자랑
유길준은 갑신정변 뒤 정부의 귀환 명령을 받아 유학 생활을 중도에 그만둬야 했다. 1884년 12월 보스턴을 출발해 1885년 유럽·동남아·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땅에 내린 즉시 체포돼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과 별장이 있는 서울 가회동 취운정에서 8년 동안 연금 생활을 했다. 유길준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그 시간은 미국·유럽을 돌아보면서 보고 느꼈던 생각을 정리할 기회였다.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배운 서양문물 관련 지식, 미국에서 에드워드 모스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아 공부한 서구 제도·문화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개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서유견문을 발간했다.

서유견문은 미국 유학 생활과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주요국을 여행하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을 기록한 개화사상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반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국·한문을 섞어 쓰고, 자비로 1000부를 발행해 무료로 배포했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뒤 유길준은 일본 망명 길에 오르고 서유견문은 금서로 지정돼 개화와 근대화의 꿈을 일깨우려던 유길준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97년 6월 7일 유길준은 도쿄에서 모스에게 영문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바깥세상에 대한 견식을 넓히도록 이 책을 무료로 배포했습니다. 이 책은 국민들에게 환영을 받아 인기를 끌면서 읽혔습니다. 그러나 제가 망명한 후에는 그것을 쳐다보는 것조차 금지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핼러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되살아나는 날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핼러윈에는 어린이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호박을 들고 다니는 풍속이 있고, 많은 사람이 마녀 재판으로 유명한 세일럼을 찾아온다. 그러나 세일럼을 찾는 한국 사람들은 100년 전 개화의 꿈을 펼치려던 유길준의 발자취를 보며 남다른 감회에 젖어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