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한 외국어, 빵빵한 경력 … 그들에겐 늙을 틈이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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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12면

● 한광우 전 LG전자 일본 지사장
2개월 경력의 택시기사 한광우씨는 운전을 할 때 항상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다. 승객에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여 믿음을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지난 40여 년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매일 입었던 정장이 제일 편하기도 하고 정장 말고는 마땅한 옷도 없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택시로 새 인생 운전하는 ‘골드’ 실버들

한씨는 1984년부터 91년까지 LG전자 일본 지사장을 지냈다. 84년 일본에 LG전자 지사가 처음 생길 때 초대 지사장이다. 여직원이랑 둘이서 시작한 지사는 이후 반도체·사무기기·컴퓨터·소프트웨어 등 4개 분야 20여 명으로 늘었다.

공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한국에 진출한 일본계 반도체 회사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10여 년 근무한 뒤 LG전자로 스카우트돼 2년 뒤 일본 지사장으로 발탁됐다. 일본계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익힌 것이 큰 도움이 됐다. 8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친 한씨는 한국으로 돌아와 신사업 본부에서 무궁화 위성 프로젝트(95년)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현장을 누비던 한씨는 94년 구강암 진단을 받고 턱 가운데를 위에서 아래로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일본에 있을 때 너무 무리했던 게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근데 막상 누워 있으려니 근질근질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실에서 결재도 하면서 일을 계속했죠.” 96년 LG전자를 떠난 한씨는 자신이 직접 회사를 설립했지만 외환위기 때 문을 닫게 됐다. 이후 한 중소기업 부사장으로 일하다 지난해 7월 은퇴했다.

주황색 택시로 불리는 인터내셔널 택시는 외국인 관광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외국어 소통이 가능한 기사를 선발한다. 현재 262대가 운행 중이다.

은퇴 후 그는 계속 일을 하고 싶어 여기저기 일자리를 수소문했다. “지금도 일본에 관련된 비즈니스만큼은 정말 자신 있어요. 그런데 내가 나이도 많고 또 경력이 화려하다 보니 오히려 회사에서는 나를 쓰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사람이 일을 하면 시간에 맞춰 생활을 하고 쉬는 것도 억지로라도 쉬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건강하고 의미 있게 사는 건데 일을 안 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냥 계속 늘어지는 거죠. 그렇게 늙고 싶지 않아서 택시운전을 시작했어요”라고 말했다.

택시 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가량 지났을 때 그는 또 다른 기회를 발견했다. 회사에 붙은 인터내셔널 택시 운전자 모집광고를 보고 일본어 특기로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것이다. 능숙한 일본어와 수십 년간 현장에서 쌓은 경영 노하우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뒤늦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됐다는 그는 “저는 평생 치열한 경쟁 속에서 비즈니스와 관련된 사람밖에 만나지 못했어요. 그런데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인연이 저한테는 행복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만난 택시승객들과 나눈 대화를 모아 책으로 쓸 계획도 가지고 있다.

5월 초부터는 인터내셔널 택시를 운전하게 될 예정인 그는 기업 경영의 최전선에서 익힌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을 것이라고 했다. 두 달간 택시 운전을 해보니 경영이랑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다만 이제는 전처럼 앞만 보고 달리진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그는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을 위해, 회사를 위해 사람들 감정을 상하게 한 적이 많아요. 늙어가는 마당에 이제는 다른 사람들한테 베풀고 싶은 마음이네요. 돈 조금 더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손님들한테 세상 이야기 들으며 즐기면서 일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한씨가 택시 운전을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부인밖에 없다. 못하게 뜯어말릴 게 뻔해서 자식들한테는 얘기 안 했고 다른 사람들한테는 굳이 먼저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 말하지 않았다. 창피하거나 숨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닌데 말 못할 이유가 뭐 있어요. 이 나이에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행복한걸요. 그나저나 지금까지 내 밑에 있던 부하직원이 한 1만 명쯤 될 텐데 그 친구들이 이 기사 보면 깜짝 놀라긴 하겠네요(웃음).”

● 김계완 전 싱가포르·베트남 농구 대표 감독
“4쿼터가 끝났는데 점수가 동점이네요. 이제 연장전 시작해야죠.”
인터내셔널 택시 운전자 자격시험에 합격해 5월 초 운행을 시작할 예정인 김계완씨는 농구경기에 빗대어 각오를 말했다. 키 1m75㎝, 농구선수치곤 작은 키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 덕분에 65세 나이보다 젊어 보였다. 80년대부터 싱가포르·태국·베트남의 남녀 농구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그는 택시 운전을 통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지금까지 농구 선수·감독을 하면서 수백 경기를 했어요. 경험상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절대 조바심 내면 안 돼요. 인생도 농구경기랑 비슷한 것 같아요.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의 작전을 선택해야죠.” 김씨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봤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중에서 가장 즐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판단해 인터내셔널 택시운전을 선택했다고 했다. 자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외국인에 대한 이해가 깊기 때문에 인터내셔널 택시가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의 농구 인생은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아버지와 삼촌들이 모두 농구선수였던 김씨는 초등학교 때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농구경기의 점수판을 넘기는 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정식 농구부에 들어가 고등학교, 공군 농구부, 대학에서 가드로 활약했다. 대학 졸업 후 73년엔 국제심판 자격증을 따 심판도 보고 고교 농구팀 코치도 했다.

75년 김씨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클럽팀에서 코치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당시 세계농구협회 사무총장이 한국인이었는데 한국인 코치를 외국에 많이 내보내려고 노력을 했어요. 저도 그중 한 명이었죠. 국제심판 자격증 따면서 영어 공부를 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더운 나라여서 모든 스포츠가 밤에 시작했다. 대부분의 선수가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면 밤에 모여서 운동을 했다. 그래서 김씨 역시 낮에는 건설현장에 식사를 제공하는 사업을 하고 밤에는 농구 코치를 했다.

6년간의 중동생활을 마친 그는 싱가포르의 한 클럽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88년까지 감독을 하면서 84, 85년에는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싱가포르에선 리그 우승팀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이 됐기 때문에 국가대표 감독까지 됐다.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교민대표로 성화봉송도 했다. 김씨는 “평택 근처였어요. 쉬운 줄 알았는데 막상 뛰다 보니 온통 언덕길에, 성화도 무거워서 혼났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태국 남자대표팀, 베트남 여자 대표팀 농구 감독을 했다. 2007년 인천에서 열린 아시아 여자 농구 선수권대회에서는 베트남 여자 농구 역사상 최초로 국제대회 첫 승을 거뒀다. “특히 싱가포르를 이긴 것은 엄청난 일이었어요. 베트남에서 농구가 조금 더 인기 있는 스포츠였으면 저도 히딩크처럼 되는 건데….(웃음)”

김씨는 25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3월 귀국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지만 60대 중반의 나이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농구 관련 일자리도 여의치 않았다. 그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인터내셔널 택시 운전기사 모집광고를 봤고 곧장 지원했다. 일단은 영어에 자신이 있었다. 책을 보고 배운 영어가 아니라 몸으로 익힌 영어라 실전에서 주눅이 드는 일이 없었다.

김씨는 자신이 택시 운전을 한다는 것을 친구나 후배들이 알면 놀라긴 하겠지만 전혀 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 보니 젊을 때는 그래도 잘나간다 했는데 나이 들어서 택시운전 한다고 창피해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제 생각은 달라요. 남 눈치 보면서 살다가는 끝까지 아무것도 못하거든요”라며 “저는 이제 경기를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한 번 열심히 뛰어 보렵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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