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후보작] 정현종 '빛-꽃망울'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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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현종씨는 탄력의 시인이다. 탄력이란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저항해 사물이 본디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의지며,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는 힘이다.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이 품고 있는 원초적인 꿈과 에너지에 속한다.

정씨는 그 에너지를 시의 정신적.문법적 동력으로 만든다. 그의 시는 그런 생명의 에너지를 주제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을 시 언어 자체의 탄력으로 전환한다. 그 탄력은 딱딱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의 절망을 공중에 띄워 올려 그것을 다시 살게 만드는 마법이다.

최근 정씨의 시들에서 그 마법은 보다 직접적이고 폭발적인 언어로 나타난다. 시 '빛-꽃망울' 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팽창하는 생명의 에너지다.

"당신을 통해서/모든 게 새로 태어난다, 내 사랑. / 새롭지 않은 게 있느냐/ 여명의 자궁이여. / 그 빛 속에서는/ 꿈도 심장도 모두 꽃망울/ 팽창하는 우주이니/ 당신을 통과하여/ 나는 참되다, 내 사랑. " 이 시는 우선은 '빛' 과 '꽃망울' 의 시며, 더 나아가 사랑과 생명과 우주에 관한 시다.

여기서 화자가 호명하는 2인칭은 '나' 를 참되게 하고 다시 살게 만드는 신성한 '빛' 이다. 그 빛은 단지 계몽의 빛이나 종교적인 빛이 아니다. 그 빛은 보다 깊고 포괄적인 생명 일반의 빛이며, 우주적인 빛이다.

그 빛을 통해 모든 사물은 새로워진다. '모든 공간은 꽃핀다' 라는 절묘한 표현은, 그 빛을 통해 모든 사물이 거듭나는 자리를 보여준다. '여명의 자궁' 과 '팽창하는 우주' 는 그 빛 속에서의 우주 만물의 생성에 관한 이미지다.

한편으로 시인은 사물의 변화와 그 시간성에 관한 탐구를 밀고 나간다. 시 '견딜 수 없네' 에서 "시간을 견딜 수 없네. /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와 같은 부분은, 단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감상적인 영탄이 아니다.

여기에는 모든 사물들의 기본적인 존재 조건으로서의 시간성에 관한 성찰이 포함된다. '시간은 슬픔이다' 혹은 '시간이여, 욕망의 피륙이여' ( '밑도 끝도 없는 시간은' 중) 라는 진술들과, '내 마음에 깃들인 이 폐허' 를 '시간의 바람결' ( '내 마음의 폐허' 중)과 관련짓는 상상력 역시 이와 같은 성찰의 연장에 서 있다. 정씨의 생명에 관한 탐구는 이렇게 살아 있는 존재의 욕망과 그 시간성에 관한 깊은 사유에 닿고 있다.

그 깊은 사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나는 그것을 시인의 눈의 깊이로부터 형성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네 눈의 깊이는 네가 바라보는 것들의 깊이이다' ( '네 눈의 깊이' ) 라는 명제를 뒤집어 읽으면, 사물들의 깊이를 경험하게 만드는 시인의 눈의 깊이가 드러난다. 그 눈의 깊이는 그의 시를 읽는 우리로 하여금 이 상투적인 삶을 새롭게 살게 만든다.

시 '서울살이' 에서 "북한산 하늘 위 뭉게구름을/ 한 손에 낚아채" 는 것을 '권태가 폭발하는 방식' 이라고 표현한 것은 진부한 일상적 삶을 거듭나게 하는 원천을 시인이 어디에서 발견하는가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바로 정씨의 시야말로 '권태가 폭발하는 방식' 이다. 정씨의 시는 한국현대시의 무거운 역사로부터, 그리고 성찰을 동반하지 않는 가벼움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시의 탄력은 우리 시의 잠행과 권태를 돌파하는 문학사적 에너지일 수 있다. 그의 시는 노래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솟아오르며 춤춘다. 아니다. 그의 시는 폭발한다.

이광호 <문학평론가.서울예술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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