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 위기] 8. 북한 핵 재처리 완료 주장과 6자회담 성사 과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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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 가운데)이 2003년 7월 14일 평양에서 다이빙궈 중국 외교부 수석 부부장(오른쪽 위에서 넷째)을 만나 북핵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다이빙궈는 이때 북한의 다자회담 참가를 희망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위원장 오른쪽은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 [중앙포토]

2003년 6월 5일 일본 도쿄(東京). 한.일 정상회담을 이틀 앞두고 양국 고위급 실무진이 공동성명 문안을 조율하고 있었다. 양국 수석대표는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와 야부나카 미토지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전날 북핵 관련 문안을 마무리짓지 못해 다시 머리를 맞댔으나 의견차를 쉽게 좁히지 못했다.

"성명에 '북한이 상황을 악화시켰을 때 보다 강경한 조치(tougher measures)를 강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문안을 넣어야 합니다. 5월 24일의 일.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입니다."(일본)

"우리는 한.미 정상회담(5월 15일) 때 합의한 '대북 추가적 조치(further steps)'란 표현을 두고서도 국내에서 (군사적 대응 가능성을 열어뒀다고)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다 강경한 조치'입니까. 그 문안은 받을 수 없어요."(한국)

일본이 입장을 굽히지 않자 급기야 우리 측에서 "그럴 바엔 아예 공동성명을 만들지 말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에 대한 정부 관계자 A씨의 설명.

"우리 측은 한.일 정상회담을 둘러싼 국내 여론이 좋지 않다는 점도 전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충일에 방일하고, 방문 기간 중 일본 국회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유사법제를 통과시키는 것 등을 예로 들었지요. 여기에 북핵 부분 공동성명이 한반도 긴장을 높이는 쪽으로 가면 정말 곤란하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이 '보다 강경한 조치'란 표현을 고집하자 공동성명을 내지 말자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일본 측은 공동성명은 반드시 내야 한다고 맞섰다. 그러다 야부나카 국장이 외부와 통화하면서 타협의 실마리가 풀렸다. 가와구치 요리코 외상과 총리 관저에 교섭 상황을 보고한 뒤 그 표현은 넣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신 '보다 강경한 조치'란 표현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공동 기자회견에서 언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북핵 관련 문안은 "양 정상은 한.미 정상회담과 일.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원칙을 재확인한다"로 매듭됐다.

일본이 '보다 강경한 조치'란 표현에 매달린 것은 미국을 배려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한.미, 한.일 정상회담을 전후해서도 북.미 간 대치는 계속됐다. 북한은 핵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나온 북.미=5월 30일~6월 1일 평양. 백남순 외무상은 방북 중인 커트 웰든 미 하원의원에게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거의 완료했다"고 말한다. 영변에서 핵 재처리 징후가 포착된 지 한달 만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핵 억제력'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6월 18일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는 정당방위조치로서 자위적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미국의 전방위 대북 압박과 맞물려 있었다. 조지W부시 미국대통령은 5월 31일 폴란드 방문 때 처음으로 대량살상무기(WMD) 확산방지 구상(PSI)을 밝혔다. 이에 대한 존 볼턴 미 국무부 차관의 설명.

"부시 대통령이 밝힌 PSI는 바다.하늘.육지에서 대량살상무기가 거래되는 것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저지만이 아니라 그걸 갖고 있거나 가지려는 불량 국가들과 테러단체로부터 그런 무기를 회수하고 폐기하는 것입니다. 평화적이고 외교적인 해결책이 기본이지만 (군사 행동 등)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외교 노력과 함께 제재와 응징은 핵 확산을 막기 위한 중요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대량살상무기의 북한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 자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6월 5일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소위 증언).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카드도 빼들었다. 6월 21일 필립 리커 국무부 대변인은 "우리는 북핵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우려를 평양에 전달하기 위해 안보리 의장성명 채택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구속력을 갖는 유엔 안보리에서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로 북핵을 다루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북.미 간 긴장을 해소할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 한.중 정상회담 하루 뒤에 나온 공동성명=한.중 정상회담(7월 7일)은 이 와중에 이뤄졌다. 이 회담은 8월에 열리는 1차 6자회담의 출발점이 된다. 정부 관계자 B씨의 설명.

"노무현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통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북한이 다자회담에 나와야 한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방중 전에 다자회담 구도의 유용성에 관한 논리를 개발합니다. 나중에 후 주석을 통해 보낸 메시지가 북한에 전달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의 이런 외교적 노력은 6자회담 개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하지만 정상회담 공동성명이 산고를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미, 한.일 정상회담 때보다 더했다. 정부 관계자 C씨의 전언.

"6월 28일 진행된 이 문안 교섭도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가 맡았어요. 중국 측 상대는 왕이(王毅) 외교부 부부장이었습니다. 중국 측은 북한의 안보 우려가 해소돼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것을 한.중 양국이 합의하는 형태로 받을 순 없었어요. 그때까진 우리가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논리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중국은 꼭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워낙 완강했지요."

중국과의 사전합의에 실패한 이 차관보는 7월 3~4일 한.미.일 3자 북핵 협의회 참석차 미국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에게 한.중 교섭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켈리 차관보는 안보 우려 해소 부분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북한의 핵 포기 대가로 어떠한 유인책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게 미국의 기본방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차관보는 "중국 측 주장에 동의했다든지 하는 표현은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이 문제가 굉장히 어렵다는 점은 양해해 달라"고 통보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국과의 공동성명 문안 조정은 정상회담 기간 중에도 계속됐다. 양측이 문안에 합의한 것은 정상회담이 끝나고 30여시간이 지난 7월 8일 밤이었다. 이례적이었다. 문안은 "중국 측은 북한의 안보 우려가 해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로 타결됐다. 중국의 일방적 주장만 담은 것이었다. 중국이 이에 집착한 것은 북한의 다자회담 참가를 설득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됐다.

◆ 결국 중국에 설득당한 북한=한.중 정상회담 후 중국은 북핵 셔틀 외교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자 북한은 벼랑 끝으로 한 걸음 더 내디뎠다. 7월 9일 워싱턴. 박길연 북한 유엔대표부 대사는 잭 프리처드 미국 대북 교섭담당 대사에게 "8000개의 사용후 핵연료봉 재처리를 끝냈다"고 통보한다. 핵무기 5~6기 제조 분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는 얘기였다. 정보 소식통 D씨의 설명.

"당시 미 정보당국은 북한이 물리적으로 핵 재처리를 완료할 수 없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한국도 같았지요. 북한이 재처리를 끝냈다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여야겠지만 실제 관찰 결과와는 달랐던 것이죠. 당시 동해 상공의 미군 정찰기가 재처리 과정에서 나오는 활성기체 크립톤 85를 단 한 차례 포착하기는 했어요. 그러나 중국 동북지방에도 원자력발전소가 있어 채집 크립톤이 북한의 재처리 과정에서 나온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 부시 행정부의 전직 고위 정보관계자 E씨가 최근 본지에 밝힌 내용은 주목된다. "미국은 이라크보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대량살상무기 존재를 둘러싼) 대이라크 정보 부재로 망신을 당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정보가 부족한 북한에 대해 공격하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북한은 이후 확대 다자회담 개최에 긍정적 신호를 보낸다. 몸값을 잔뜩 올려놓고 대화에 나오는 전통적 협상술이었다. 북한은 4월의 3자(북.미.중)회담 직전에도 핵 재처리를 성과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7월 14일 평양. 12일 방북한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부 수석부부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다. 한.중 정상회담 때 노 대통령이 후 주석을 통해 김 위원장에게 보낸 메시지는 이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 위원장은 다이빙궈에게 "우선 북.미 간에 진지한 대화가 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가능하면 우리는 대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면담 뒤 6자회담 개최는 급물살을 탔다. 다이빙궈의 방미(7월 17~21일)에 이어 한.미, 미.일, 미.중 정상 간 전화 통화가 이뤄졌다. 7월 31일. 북한은 한국.러시아를 비롯한 관계국에 6자회담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당초 5자(남북, 미.일.중)회담 얘기가 나오다 러시아가 포함된 것은 북한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북한이 러시아에 미국의 압박에 대한 완충 역할을 바랐던 것으로 관측됐다. 그러나 북핵 1차 6자회담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뒤이어 미국이 한국에 이라크 추가 파병을 요청하면서 한.미 관계는 삐걱거린다.

오영환 기자, 정용수 연구원

*** 북핵 관련 주요 회의

(2003년 5~8월, 시간은 서울 기준)

▶ 5월 24일=미.일 정상회담(미 텍사스주 크로퍼드 목장), 북한 상황 악화 땐 보다 강경한 조치 취하기로 합의

▶ 31일=부시 미 대통령 폴란드 방문,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 구상(PSI) 표명

▶ 6월 1일=미.러 정상회담(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북한 핵 프로그램 포기 촉구 미.중 정상회담(프랑스 에비앙), 한반도 비핵화 의견 일치

▶ 3일=G8(서방 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에비앙), 북한에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 수용 촉구

▶ 7일=한.일 정상회담(도쿄), 한.미, 미.일 정상회담 합의 재확인

▶ 17일=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 회의(캄보디아 프놈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복귀 촉구 의장성명 채택

▶ 7월 7일=한.중 정상회담(중국 베이징), 한반도의 평화.안정 유지 및 한반도 비핵화 합의

▶ 12~15일=다이빙궈 중국 외교부 수석부부장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14일)

▶ 17~21일=다이빙궈 방미, 다자회담 개최 문제 논의

▶ 31일=북한, 한국.러시아에 6자회담 수용 통보

▶ 8월 27~29일=제1차 6자회담(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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