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철도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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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된 것은 1899년 9월 18일이었다.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33.2㎞ 구간이 개통된 다음날 독립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 걸어서 하루가 꼬박 걸리는 길을 1시간30분에 주파했으니 과장보도라고 탓할 건 아니다.

제임스 와트가 1776년 발명한 증기기관을 운송수단에 응용한 선구자는 리처드 트레비식이었다. 트레비식은 1801년 처음으로 증기기관차를 발명해 시운전을 한 데 이어 1808년 고압 증기엔진을 장착한 증기기관차로 유객에 나섰다.

런던 시내에 원형 트랙을 설치하고 당시 노동자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1실링을 받고 사람들을 태웠다. 시속 8㎞에 불과한 이 시승기관차에 트레비식이 붙인 이름은 '캐치 미 후 캔(Catch-Me-Who-Can)' 이었다.

세계 최초로 철도를 개통한 조지 스티븐슨이 1829년 제작한 최고시속 48㎞의 증기기관차 이름이 '로켓' 이었던 걸 보면 과장이 자연스럽게 통하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시속 3백㎞의 고속전철이 3년후면 우리나라에서도 개통될 예정이지만 아직도 철도는 속도의 신화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이 애용하는 낭만적 교통수단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노선인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려면 열차 안에서 꼬박 6박7일 동안 먹고 자며 9천3백㎞를 달려야 한다.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유장한 환상 같은 것이다.

시베리아 평원과 우랄산맥을 가로질러 8박9일을 달려간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마침내 오늘 새벽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비행기로 가면 10시간이면 충분한데도 굳이 열차를 고집하는 걸 놓고 고소공포증에서 신변안전설, 전용기 부재설까지 설왕설래가 분분하다. '스텔스 여행' (비밀여행)이란 말까지 나왔다. 게다가 그가 탄 특별열차에서 탄흔이 발견됐다는 뜬금없는 보도는 여행의 비밀스러움을 더해주고 있다.

일본에서 주문제작한 21량의 열차에 1백5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인터넷 서핑을 즐기며 가다 서다를 마음대로 하는 그 여유만큼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그 여유로 답답하게 막혀 있는 남북대화의 물꼬나 시원하게 터준다면 좋으련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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