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단 고이즈미 어디로 가나] 下. 경제회생 묘수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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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카탈로그는 잘 만들었다. 이제는 물건을 보여줄 때다. 납기일이 얼마 안남았다. "

참의원 선거 후 일본의 한 정치평론가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를 평가하면서 한 말이다. 구호와 공약으로 개혁을 잘 써먹었지만 정작 고통이 뒤따르는 실천은 지금부터라는 뜻이다. 또 승리에 취하지 말고 신속한 개혁정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주문도 들어 있다.

선거 후에도 일본의 최대 현안은 여전히 경제다. 다시 가라앉고 있는 일본 경제를 어떻게 살려내 '일본발 세계불황' 을 막느냐가 고이즈미 정권의 최대 과제인 것이다.

◇ 시장은 여전히 싸늘=선거 직후인 7월 30일 닛케이지수는 11, 579.27엔으로 선거 전보다 2백18.81엔이나 급락하면서 최근 16년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후 이틀간 오름세를 보였지만 대기업들의 잇따른 실적악화 발표로 불안한 모습은 가시지 않고 있다. 엔화가치도 달러당 1백23엔대에서 선거 직후 1백25엔대로 하락했다.

증시 관계자들은 이를 구체적인 개혁정책이나 일정이 제시되지 않은 데 따른 시장의 불안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애널리스트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이 자민당의 압승이 금융시장의 호재는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도 이런 분위기를 대변한다. 실업률(4.9%)과 경기체감지수도 모두 최악의 수준이다.

이런 악재들은 동전처럼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고이즈미 총리에 대한 신임으로 이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큰 정치부담이 될 수 있다.

◇ 시간이 없다=선거 압승이 고이즈미에게 여유를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민당내의 입지는 다졌지만 개혁에 대한 요구가 더 절박해진 만큼 보다 신속한 대응이 필요해졌다.

고이즈미 총리도 이같은 현실을 인식해 지난달 31일 ▶도로공단 등 특수법인에 대한 재정지원을 내년 중 1조엔 삭감하고▶올 가을까지 이들의 민영화 방안을 마련하라고 내각에 긴급 지시했다. 또 은행의 부실채권 정리를 올해부터 강도 높게 추진하고 증시대책도 조만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처방에는 눈에 번쩍 띄는 알맹이가 없다. 과거 대책의 재탕 삼탕이란 비판이 벌써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증시대책이란 것도 말은 그럴듯하지만 정부의 개입엔 한계가 있다. 서두르다 보니 우선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부터 내놓고 있는 모습이다.

◇ 일도양단이냐, 이해조정이냐=시장의 가장 큰 관심사는 고이즈미 총리가 당초 공약대로 '성역없는 개혁' 을 일도양단식으로 해치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자민당 내부에서도 반발이 많다. 우정사업.건설업 관련단체의 지원을 받는 의원들은 고이즈미 총리의 우정사업 민영화나 부실채권 정리에 반론을 펴고 있다. 특히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전 정조회장은 "일본이 멋모르는 학자들의 실험장이 돼서는 안된다" 며 급진적 개혁론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은행들도 한꺼번에 부실을 털어 적자를 내면 주가가 떨어져 추가 부실이 생겨난다며 정부의 부실채권 조기정리에 반대하고 있다.

◇ 예산국회가 관건=고이즈미 총리의 '개혁 서슬' 이 다소 누그러진 인상이다. 당초 1~2년간 마이너스 성장을 각오하고라도 구조개혁을 강행하겠다는 기세에서 물러나 경기대책에도 충분한 배려를 하면서 마이너스 성장은 절대 막겠다는 쪽으로 물러섰다.

엔진이 충분히 달궈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5단 기어를 넣었다가 다시 3단으로 바꿔 넣은 형국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개혁 엔진' 이 다시 탄력을 받아 돌아갈 지, 털털거리다 멈출지는 구조개혁안이 처리되는 올 가을 예산국회에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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