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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고이즈미의 일본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보수적인 일본의 정치풍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어지러운 헤어스타일을 하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헤어스타일 못지않게 격식을 파괴하고 툭툭 튀는 그의 발언들은 오랜만에 일본인들을 열광시켰다.

자민당(自民黨)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총재가 되고 총리가 된 그는 69%라는 경이적인 국민의 지지를 업고 참의원선거에서 대승을 거뒀다. 일본의 유권자들은 고통이 따르는 개혁을 하겠다는 그를 믿어준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 그렇게 고이즈미에게 열광하는가. 대답은 그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일본인들이 "잃어버린 10년" 이라고 한탄하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좌절과 아노미(Anomie)에 있다. 아노미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전통적인 도덕과 윤리 같은 규범들이 혼란에 빠지는 현상이다.

*** 고통이 따르는 개혁 예고

고이즈미는 얼마나 병든 일본을 계승한 것인가.

93년 자민당 장기집권체제 붕괴, 95년 헤이세이(平成)불황 시작, 고베 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이 일어난 그런 일본이다.

땅값과 주식값이 폭락했다. 땅값 폭락은 특히 충격적이었다. 89년 말 일본의 땅값 총액 2천1백조엔은 미국의 땅값 총액 5백조엔의 4배로 계산됐었다. 그것이 최고 3분의1로 떨어졌다.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움켜쥐고 비명을 질렀다.

일본인들의 절망감이 더욱 컸던 것은 80년대 레이건.대처.나카소네(中曾根) 트리오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호황 속에 일본이 마침내 미국과 유럽을 추월했다고 기뻐하는 순간 일본의 안정을 흔드는 사건들과 장기불황을 만났기 때문이다.

교토(京都)대학의 사와 다카미쓰(佐和隆光)교수는 지난 10년간 일본인들의 지적열등화(知的劣等化)와 문화의 쇠퇴가 진행됐다고 말한다. 같은 대학의 아사다 아키라(淺田彰)교수는 93년부터 몇번 시도된 정치개혁의 실패는 냉소주의를 낳았다고 말하고, 종교학자 야마오리 테쓰오(山折哲雄)는 2000년의 일본 사회의 상황을 15세기 일본 전국시대 직전의 혼란에 비유한다.

고이즈미가 말하는 "고통이 따르는 개혁" 의 그 고통이라는 것은 실업자와 문닫는 기업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일본의 실업률은 이미 기록적인 5%다.

고이즈미의 계획대로 정부가 재정지출을 줄이고 13조엔의 악성채권을 정리하면 기업의 추가도산으로 20만명의 새로운 실업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을 아는 일본인들이 고이즈미에게 성역없는 개혁을 위임하는 것은 10년 이상 계속되는 정치.경제.도덕적 위기를 더는 방치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경제대국 일본은 지금 중병(重病)에 신음하는 공룡 같은 꼴이다. 일본인들의 좌절감은 역사왜곡을 통한 이웃나라 괴롭히기 같은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형태로 발산된다.

8.15 패전(敗戰)의 날 나라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득 부득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고이즈미의 고집도 집단 우울증에 걸린 것 같은 일본인들의 아픔을 달래려는 정치적인 배려에서 일 것이다.

세계인들의 관심은 고이즈미가 자민당 내외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누르고 경제를 장기정체에서 구출하는 개혁에 성공할 것인가에 쏠린다.

특히 미국의 조지 부시는 80년대 레이건.대처.나카소네의 신자유주의 연대를 부시.고이즈미 공동전선으로 부활시켜, 일본의 시장개방을 유도하고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는 안보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싶어한다. 미사일 방어망에 대한 일본의 지지확보가 당장의 과제다.

*** 이웃국과 진정한 화해를

한국의 관심은 두 갈래다. 고이즈미가 정치적인 계산에서 우경화하는 여론에 편승해 자신도 더욱 우경화할 것인가. 그리고 역사교과서 문제를 포함한 한반도와 중국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다.

고이즈미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개혁이 성공해 80년대의 번영을 재현한다고 해도 일본이 국제정치에서 경제대국의 지위에 합당한 영향력을 가지려면 도덕적 권위가 필요하다.

그 도덕적 권위는 독일 같이 과거를 청산하고 일본이 학대한 이웃나라들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지금 같이 과도한 국가이기주의에 매달려 있는 한 일본은 문화적.도덕적으로는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30년, 50년을 각오해야 한다.

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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