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구 의원들이 본 비례대표 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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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행 비례대표 선출방식의 개선이 불가피해졌다. 헌법재판소가 1인1표로 지역구의원과 비례대표의원을 결정토록 한 지금의 제도는 유권자의 선택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이라고 판결한 때문이다. 여기에 헌재는 비례대표 결정과정의 비민주성도 지적해 '측근공천.돈공천' 관행도 수술해야 할 형편이다.

중앙일보는 비례대표제도의 허와 실을 가장 잘 아는 비례대표 의원들에게 현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을 익명보장을 전제로 물었다. 동시에 그들이 16대 국회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지도 점검해보았다.

◇ "전문성 살릴 기회를 잡아야" =직능대표성이 뚜렷한 전문가일수록, 지역구 민원에서 자유로운 위치라는 점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비례대표 의원일수록 성공적인 의정활동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의원들에게 '비례대표 의원으로서 의정활동을 가장 잘한다고 생각하는 의원 두명을 골라달라' 고 질문했다. 그 결과 김홍신(보건복지위).박세환(국방위.이상 한나라당)의원이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고, 이미경(문화관광위).허운나(과학기술정보통신위.이상 민주당)의원과 이상희(과기정통위).이한구(재경위).전재희(환경노동위.이상 한나라당)의원이 그 다음 그룹을 형성했다.

의원들간의 이런 내부평가는 그들이 소속한 상임위 관계자들의 평가와도 대체로 일치했다.

높은 평가를 받은 이들 의원 7명은 ▶자신이 원하는 상임위에 배치돼 전문성을 살릴 기회가 많았고▶정책과 관련한 당직이 적절하게 주어졌으며▶지역의 이해에 민감한 지역구 의원과 달리 전국적인 이슈를 개발해 차별성을 보여주겠다는 집요한 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면 평가가 낮게 나타난 비례대표 의원들은 여야간 정쟁이 심해질 때 상대방에 대한 공격수로 나서 '보스의 충성파' 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차기 총선에서 지역구 출마를 모색한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 차별대우 받는 비례대표=예비역 육군소장으로 재향군인회장을 지낸 장태완(70.민주당)의원은 금융감독원을 주된 소관기관으로 하는 정무위원회에 배치돼 있다. 직능대표성과 특정분야의 전문가 발탁이라는 명분으로 비례대표 의원이 됐지만 실제 의정활동에선 엉뚱한 상임위로 배정된 예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설문조사에서 비례대표의원들의 63%가 지역구 의원과 비교해 차별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응답했지만, 관행이나 제도의 측면에서 그들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우선 비례대표 의원(46명)수는 국회의원 전체의 17%다. 그러나 25명이 소속된 건설교통위원회에는 비례대표 출신이 한명도 없다. 건교위는 의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임위로 2년 임기의 상임위원 선임 때마다 치열한 경합이 벌어진다.

역시 노른자위 상임위로 꼽히는 행정자치위.재정경제위(정수 23명)엔 비례대표 의원이 각각 1, 3명이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한나라당의 비례대표 A의원은 "국회의원들은 당의 대통령 후보 등을 뽑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지명권을 갖는데, 지역구 의원은 대의원 23명을 지명할 수 있는데 반해 비례대표 의원은 고작 3명만 지명할 수 있다" 고 했다.

지역구 의원이 국회의원(3명 지명권)과 지구당 위원장(20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격차인데 민주당과 자민련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례대표 의원이 여야를 막론하고 선출직 당직(최고위원이나 부총재, 원내총무)에 한명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헌당규상 이같은 원천적 차별이 존재하는 것과 관계있다는 분석이 많다.

김홍신 의원은 "국회 본회의의 대정부 질문, 당내 발언권, 당직배려 등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고 말했다. 여기에 재력이 있는 비례대표 의원들의 경우 등원 이후에도 당 또는 실력자들로부터 직간접적인 '재정적 기여' 를 요구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공천헌금과 함께 이들을 '봉(鳳)' 으로 여기는 이같은 인식도 비례대표 의원들의 이미지와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 "1인2표제로 직접선택 효과를" =설문에 응한 의원들은 개선책으로 '비례대표제 폐지' 보다 '1인2표제 도입' 쪽을 압도적으로 선호(94%)했다. 그들은 "1인2표제를 통해 비례대표 의원들이 유권자로부터 직접 선택을 받게 되면 차별대우와 공천헌금 등이 줄어들 것으로 본다" 고 기대했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과기정통위)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국방위), 이만섭 국회의장과 외유 중인 의원 2명 등 5명은 조사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조사대상 의원 중 5명은 접촉이 안 돼 최종답변을 받지 못했다.

전영기 ·고정애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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