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체 게바라, 무전여행 떠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1928~67). 지난 세기 말부터 불기 시작한 체 게바라 열풍은 그를 젊은이의 우상으로 만들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혁명가로서의 체 게바라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이제 길거리 좌판에서 만날 수 있는 티셔츠 속 아이콘일 뿐이고, 젊은이들은 정작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저 상품으로서의 체 게바라를 사랑한다.

체 게바라를 소재로 한 첫 상업영화로 기록될 '모터사이클 다이어리'(12일 개봉, 제작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 윌터 살레스)는 이와 반대다. 혁명을 이야기하지 않는 혁명가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가장 혁명적인 영화가 됐다.

그렇다고 체 게바라를 미화한 전기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웅을 영웅으로 그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빼고 젊은 시절의 체 게바라, 아니 에르네스토 게바라였던 시절 그가 감행했던 무모한 남미 여행을 담담하게 따라가며 게바라를 더욱 친근한 인물로 만들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의 23세의 의대생 에르네스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단짝 친구이자 생화학자인 알베르토(로드리고 드 라 세르나)와 함께 낡은 포데로사 모터사이클에 몸을 싣고 남미 여행을 떠난다. 젊음 하나만 믿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나 칠레와 페루를 거치는 이들의 무전 여행은 유쾌하기 그지없다. 사랑에 아파하면서도 길에서 만난 칠레 아가씨에게 귀여운 사기로 와인 한잔 얻어먹고, 유부녀를 꾀다가 줄행랑을 치기도 한다.

젊었기에 가능했던 이 치기 어린 여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니 남미 대륙과 좀더 깊숙이 만나면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바뀐다.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페루 쿠스코에 가서 "겪어보지도 못했던 세계를 그리워한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남미의 역사에 대해 되씹어 본다. 나환자촌에서는 의사와 환자를 갈라놓는 아마존강을 헤엄쳐 건너가며 '하나 되는 라틴 아메리카'라는 그의 신념을 몸소 보여준다.

자신을 '시인이 되지 못한 혁명가'라고 불렀던 게바라답게 심심찮게 등장하는 로르카와 네루다.보들레르의 시구와 남미의 아름다운 풍광, 이에 뒤지지 않는 음악의 선율도 영화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 15세 관람가.

안혜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