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카를로 비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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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는 지난해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에 심사위원특별상을 안기는 등 한국과 인연이 많다.

카를로비 바리란 카를(사람 이름)의 온천이라는 뜻이며 독일인들은 같은 뜻을 지닌 칼스바트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칼스바트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명작 '이탈리아 기행' 에 등장한다. 서구 교양인의 필독서의 하나라는 이 기행문은 37세였던 괴테가 1786년 9월 3일 오전 3시 이곳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울 시네마테크 주관으로 5월 말 열렸던 프랑스의 거장 알랭 레네 감독 회고전에서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라는 난해한 작품이 상영됐다. 마리앵바드는 체코에 있는 마리안스케 라즈네의 독일어 이름인 마리엔바트를 프랑스어식으로 읽은 것이다.

이들 도시가 있는 체코 북서부는 수백년간 독일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독일인들이 주데텐란트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영토 욕심에 가득 찼던 나치독일은 1938년 영국.프랑스와 뮌헨협정을 하고 이 땅을 독일에 병합했다.

히틀러는 이윽고 체코의 남은 땅도 식민지로 삼고 측근이자 유대인 학살을 기획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총독으로 파견해 가혹한 통치를 했으며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그 대가로 2차 세계대전 후 국제사회에 의해 이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 3백여만명이 독일로 영구 추방됐다. 이 과정에서 수십만명의 독일인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도시와 거리의 독일식 이름은 체코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체코는 현재 중등학생들에게 독일어와 영어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 6년간 배우도록 하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는 독일어와 러시아어 중 하나를 선택토록 했다. 아무리 악연이 깊어도 이웃나라이고 문화.경제적으로 밀접하기 때문에 체코에서 독일어는 계속 중요한 외국어다.

물가가 싸고 언어소통도 쉬운 온천도시 카를로비 바리나 마리안스케 라즈네는 독일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기차에선 당연히 독일어 안내방송이 나온다. 침략자 나치와 독일은 별개라는, 열린 생각의 반영일 수도 있다. 우리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그런 식으로 공존해왔다.

최근 일본 정부의 왜곡교과서 검정 통과조치가 비록 주변국을 무시한 처사여서 한국인의 분노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내 기차의 일본어 안내방송을 중단하려고 했던 철도청의 처사는 비록 하루살이로 끝났지만 너무 속좁은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호교류가 많아야 이해의 폭도 넓어지는 것이 아닌가.

채인택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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