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학현 민석홍 서울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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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역사란 인간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넓은 무대와 장구한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인간 드라마' 는 이미 상영해 버린 드라마인지라 그 지나간 시간을 캐내야 하니까 공부할수록 골치가 아프지. "

지난 22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서양 사학계의 거목 학현(鶴峴) 민석홍(閔錫泓) 서울대 명예교수. 그가 지난해 나온 학계 원로들의 대담집 『학문의 길 인생의 길』(역사비평사)에서 말한 역사에 대한 정의다. 생전 마지막 글로 보이는 이 책에서 閔교수는 역사학도로서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했던 삶을 담담히 술회했다.

발인을 하루 앞둔 23일 저녁 삼성서울병원 17호 영안실은 오랜 학문적 동지와 후학들이 삼삼오오 둘러 앉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애제자로 전공(프랑스 근세사)을 물려받은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우리 서양사학의 계보로 치면 선생은 길현모 전 서강대 교수, 노명식.양병우 전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제2세대에 속한다" 며 "오늘날 우리의 서양사학계가 양적으로 크게 팽창했다 해도 제2세대가 보여줬던 문제의식과 치열함을 능가했다고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고 말했다.

고인은 이 제2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공은 프랑스 혁명사. 이 분야의 독보적인 권위자로서 그는 1950년대 말 프랑스 혁명을 명백한 시민혁명으로 규정하는 논문을 '사상계' 등에 발표해 4.19혁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울대 김용덕(동양사)교수는 "당시 선생의 프랑스 시민혁명사 강의는 지금도 전해오는 명강의로 정평이 나 있다" 고 소개했다.

25년 서울에서 출생한 閔교수는 42년 5년제인 경기공립중학교(현 경기중)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의 '넘버 스쿨' 중 하나인 나고야(名古屋)의 제8고에 입학한 수재였다.

최교수는 "60, 70년대엔 동년배로 이미 작고한 송욱(영문과).이해영(사회학과)교수 등과 함께 서울대 '수재 3인방' 으로 불릴 정도로 명석한 분이었다" 고 말했다.

당초 문학청년을 꿈꿨던 그가 역사학 연구를 인생의 좌표로 삼은 것은 44년 교토(京都)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다. 해방 이후 서울대 사학과 편입 당시의 전공은 동양사였으나 48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서양사로 전공을 바꿨다. 서양사학 제1세대이자 연대 교수로서 당시 서울대에 출강하던 조의설 교수가 그의 스승이었다.

고인은 이후 프랑스 혁명 연구에 매진해 53년 불후의 논문인 '18세기 프랑스 농민의 성격' 을 역사학보 제4집에 발표했다. 최교수는 "이 논문으로 선생은 학계에 혁명사가로서 입신했다" 며 "당시 논문의 체제나 시각은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고 평가했다. 閔교수는 '서양근대사연구' (75년), '서양사개론' (84년), '프랑스혁명사론' (88년)등 노작을 남겼다.

학자로서의 인생은 꼭 밝지만은 않았다. 장기간의 서울대 보직 교수 시절은 '학문적 암흑기' 나 다름없었다.

고인은 최문환 총장 시절인 68년 교양과정부 부장을 맡아 75년까지 일했다. 교양과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 신입생들의 데모 억제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 근대화론' 의 암묵적 동조자란 후대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고인보다 한 살 아래인 나종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 때 꿋꿋하게 학문의 길을 고집하지 못했던 것은 학문적으로 큰 손실" 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정명환 전 서울대(불문학)교수는 "고인은 클래식과 오디오 매니어로서 전공 수준을 능가했으며, 특히 브람스와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좋아했다" 고 회고했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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