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 (3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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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8. 혼쭐난 배추밭 울력

환속소동이 마무리되고, 친구들의 발걸음도 끊어질 무렵 김장을 준비할 철이 다가왔다. 김장거리로 심었던 배추.무는 말 그대로 청정채소다.

해우소(解憂所.근심을 푸는 곳이란 뜻으로 화장실을 지칭)에 채워 놓았던 풀을 썩혀 만든 두엄으로 거름을 썼으며, 풀벌레도 약 대신 손으로 잡아내곤 했다. 스님들이 먹는 음식은 득도를 위한 밑거름이기에 이같이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가을이 깊어 단풍이 드는가 싶더니 이내 낙엽이 되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울력을 알리는 목탁이 울렸다. 원감(채소밭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 스님의 작업지시가 이어졌다. 날씨가 추워지고 낙엽이 떨어지니, 배추가 얼지 않고 낙엽이 배추 속으로 들어가지 않게 짚으로 배추 끝을 꼭꼭 묶어주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일제히 골을 따라 배추 끝을 묶어나가기 시작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니 힘이 들고 허리가 아파왔다. 그래도 열심히 묶어나갔다. 얼마를 하다가 허리도 쉴 겸해 몸을 쭉 펴고 주위를 둘러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울력이라면 내가 항상 꼴찌인데, 오늘은 내가 일등이 아닌가. 다른 대중스님들은 나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뭔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작업반장격인 원감스님이 별 말을 않기에 그대로 계속 해나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고, 여느 때처럼 성철스님이 둘러보려 내려왔다. 내 곁으로 오더니 고함을 질렀다.

"원택이, 이놈아!"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있는데 큰스님께서 성큼성큼 다가와선 느닷없이 밀쳐버린다.

"이놈아! 일을 모르면 묻든가, 아니면 남 하는 것을 눈여겨 보든가 해야지. 맨날 이 모양이제!"

도대체 내가 왜 야단을 맞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큰스님이 내 귀를 쥐고 잡아당기며 다른 사형들이 일하는 골로 끌고 갔다.

"니 해논 거 하고, 이거 하고 한번 비교해 봐라. 뭐가 틀리는지.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 어디 있나? 우리 집에 앞으로 도인(道人) 났다 하면 이 멍청이 원택이가 될끼다. 우째 이래 모르노!"

그 때까지도 뭐가 잘못 됐는지 몰랐으니 나도 참 눈썰미가 없긴 없었다. 한참을 혼나고 나서야 원감스님이 다가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원감스님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냥 하얀 배추 속살의 잎끝만 묶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누렇게 변해 땅바닥에 처져 있는 큰 배추잎(전잎)을 손으로 일으켜 세워 배추 속살을 감싸 묶어주어야 했다. 그래야 속이 얼지 않고 또 낙엽이 배추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도 모르고 땅에 처진 잎은 그대로 두고 멀쩡히 서 있는 배추잎만 묶고 갔으니 남들보다 엄청 빠를 수밖에.

지금까지 한 일은 모두 헛일이 돼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앞이 막막한데 큰스님이 절로 올라가면서 한마디 쐐기를 박았다.

"저 멍청이가 지 일 다 마칠 때까지 아무도 도와주지 말아라. "

남들은 일이 거의 다 끝났는데 이제 새로 시작하려니 허리가 더 뻐근해오는 것 같았다. 큰스님의 명이 있었으니 다른 스님들이 도와줄 엄두도 못내고 엉거주춤 서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원감스님이 다가오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는 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도 오늘 원택스님은 큰스님한테서 큰 수기(授記.약속이나 예언) 받았으니 얼마나 좋아. 앞으로 백련암에 도인이 나온다면 그거는 원택이라고 큰스님이 말씀하셨잖아. 나도 꾸중이라도 그런 소리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

위로하는 건지, 핀잔하는 건지 원감스님이 능청을 떨었다. 허리는 부러질 듯 아팠지만 그래도 듣기에 싫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저 큰스님께 송구스러울 뿐이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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