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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명 단편집 '가장 멀리 있는 나'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낮잠에서 깨어나 시간과 공간에 현실감을 잃고 공연히 서러웠던 느낌' . 그의 최근 단편에 나오는 이 표현 같이, 윤후명씨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일상사의 현실감은 저멀리 달아난다.

그리고 까닭 모를 외로움이 밀려온다. 낮잠에서 깨어나니 어느덧 해는 서산에 붉게 기운다. 엄마는 간데없어 쓸쓸한 시공(時空)의 마당에 나홀로 버려졌다는 어린 시절의 죄없는 외로움이 윤씨의 소설에서는 와락 밀려온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문학으로서의 삶인듯 삶으로서의 문학인 듯이 살아가고 있는 윤씨가 최근 소설집 『가장 멀리 있는 나』(문학과지성사.8천원)를 펴냈다. 시인으로 출발한 윤씨의 소설들은 이런 저런 사건이 전개되며 너와 나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소설 본래의 서사성보다는 감춰진 내면의 고백을 통한 독자와의 공감, 울림 쪽으로 나간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12편의 단편들도 외로움을 통해 가장 순수한 삶의 시원을 찾아가고 있다.

"포플러나무 뒤로 멀리 뻗어 있는 칼미크의 길은 내 고향 길과 똑같았어. 아니. 똑같은 게 아니라, 그 길 자체였어. 나는 그걸 단순한 착시 현상이라고 옆으로 밀어놓을 수가 없어. (중략)나는 새하얀 고향 길을 앞에 하고 홀로 서 있었어. "

'가장 멀리 있는 나.6' 에서 카스피해 북서쪽에 있는 러시아의 자치공화국 칼미크의 포플러 나무 길에서 어릴적 고향의 길을 보고 있듯이 윤씨 자신으로 보아도 좋을 1인칭 주인공 '나' 는 이 소설집에서 중국.러시아.동남아.중남미 등 세계를 떠돌며, 또 우리의 산간벽지를 찾아들며 잃어버린 고향을 찾고 있다. 그 여정에는 언제나 잃어버린 여자와 포플러 같은 나무가 함께 한다.

소설집 처음에 실은 '외뿔 짐승.1' 에서 '나' 는 '그녀' 와 함께 불태워버린 나무 한 그루의 흔적을 찾아 용문산으로 떠난다. '그녀' 가 내 친구와 잤다는 사실을 안 내가 산채로 활활 불태워버린 나무다. 그 불탄 나무는 찾을 수 없고 대신 온통 초록색으로 타오르는 살아 있는 '나무들의 행진' 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온다. 선악에 눈뜨면서 소실되게 마련인 순수, 그 상징으로서의 나무이지만 그 '순수의 소실' 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낭만적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 순수, 나무의 세계로 가는 도정에는 항상 여인들이 같이 한다. "삶이란 별게 아니었다. 그리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남녀의 교접도 그것이었다. " 인사동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에서부터 무당이 되려는 여자, 스님이 된 여자, 삶의 막다른 길목에서 산중에 들어와 개를 기르는 여자, 중국에서 접대부로 일하는 탈북 여성 등과 만나고 헤어지며 그 여성들에게서 '비천녀(飛天女)' 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득한 어느 먼 나라에서 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늘과 땅을 잠재우고, 아기 공룡들을 잠재우고, 어지러운 마음을 잠재우는 자장가 소리였다. 나같이 허덕이며 쫓기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노랫소리였다. "

'외뿔짐승.5' 에서 일상에서 일탈해 며칠간 함께 보낸 여자를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내며 비천녀가 들려주는 노래인 듯, 시공을 초월한 음악을 듣듯 윤씨의 소설들은 현대적 일상을 모반, 순수의 시원을 거슬러오르며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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