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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존경하는 추기경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존경할만한 원로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김수환 추기경" 이라고 외칠 것이다. 만약 '존경할만한 원로를 더 얘기하라' 고 한다면 그 때부터는 꽤나 망설이고 고민하다가 겨우 서너 사람의 이름을 보탤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추기경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달려가곤 해왔다. 최근 추기경을 만난 것은 지난 6월 27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 식당이다. 이날 열린 추기경의 팔순잔치는 나를 슬프게 했다.

*** 붉은 색깔 덧씌우기 곤혹

정치권의 대권주자를 포함한 숱한 명망가 하객들, 길게 이어 붙인 테이블의 다리가 휠 정도로 높이 쌓아올린 과일과 떡, 쉴새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그리고 한시간여 이어진 축하의 말씀과 노래.

그러나 어떤 화려함도 마르고 구부정한 노(老)추기경을 가릴 수는 없었다. 하객들에게 일일이 미소로 답을 하다가 가끔 무표정한 표정을 지을 때면 자꾸만 입가의 침을 닦던 모습(KBS-1TV '도올 논어이야기' 출연 당시)이 떠올랐다. 거의 유일하게, 확실히 존경할만한 원로라고 생각해온 추기경.

그의 무표정에 담긴 팔순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런데 나 아닌 그 누구라도 존경할 만한 원로로 추기경을 첫손에 꼽을 것이라고 믿는 터에 비록 극히 일각에서나마 추기경에 대해서 불필요한 오해를 하는 듯해 착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종교인으로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인 추기경을 이데올로기의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요즘 같은 상황에서 종교와 이데올로기라는 민감한 두가지 주제를 함께 얘기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추기경과 천주교에 무슨 색을 칠하며 추기경이 좌파에 경사된 것처럼 주장하는 태도에는 침묵하기가 더 거북하다.

첫째, 아주 원론적인 얘기로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기독교와 신을 부정하는 유물론(唯物論)을 역사철학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공산주의는 근본바탕부터 어울리기 힘들다. 어느 누구도 천주교가 기독교가 아니라거나, 북한이란 체제가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천주교는 매우 신중한 조직이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 '7대 종단' 명의로 나온 지지성명에 천주교는 서명하지 않았다.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주도한 모임에 아예 참석하지도 않았다.

"종교계가 성급하게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 이라고 한다. KNCC측이 일방적으로 천주교 이름을 넣은 성명을 언론에 배포하는 바람에 천주교가 참여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셋째, 천주교는 융통성 있는 조직이다. 바티칸에 있는 교황을 정점으로 전세계가 하나의 조직이랄 수 있는 천주교는 거대한 조직을 살아 움직이게 하기 위해 내부적 다양성을 널리 인정한다.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는 주교회의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세무조사 지지 성명을 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교회법상 기본적인 교리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추기경은 1951년 사제서품을 받은 이후 꼭 50년간 공적인 삶을 살아왔다. 특히 서울대교구장이 된 68년 이후 그의 공적 삶은 거의 대부분 언론에 노출돼 왔다. 그가 70,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정치적 발언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주화를 촉구하는 그의 주장을 좌파라고 분류하긴 힘들다.

*** 형제애 ·사랑의 나눔 실천

그가 최근 관여하고 있는 북한 관련 활동은 '과학책 보내기 운동' '내복 보내기 운동' 등 북한주민, 특히 어린이들의 생활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물건을 보내는 일이다. 천주교에선 이를 '형제애와 사랑의 나눔' 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팔순의 추기경에게 붉은 색깔을 덧씌우려는 시도는 나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추기경에게 사과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오병상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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