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21C 동아시아의 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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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사무국을 방문하고 나오면서 이 글을 쓴다. 세계를 크게 3분해 보면 우선 미국은 팽창하고 있다.

미국은 기존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를 중미와 남미 쪽까지 확대해 전 아메리카의 경제통합을 도모하고 있다.

다른 한편 유럽은 동구까지를 포함, 유럽 전체를 하나의 정치.경제 공동체로 묶어 단일의 '유럽합중국' 을 만들려 하고 있다. 이제 내년 1월이면 유럽이 유로(EURO)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게 된다.

***교과서 왜곡 등 反目 심화

그런데 아시아,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한마디로 분열과 반목이다. 미국은 팽창하고 유럽은 통합하고 있는데 아시아는 분열하고 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교과서 문제와 이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반응이 한 예다. 아직 아시아에서는 19세기가 끝나지 않았다. 아시아는 아직 21세기의 프로젝트를 찾지 못하고 있다.

과거가 청산되지 않으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군사독재가 끝나면 민주사회가 저절로 오는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 도대체 과거의 청산이란 무엇인가? 과거에 대해 사죄하면 그것으로 청산이 되는가.

전쟁과 식민이라는 과거에 대한 진정한 청산은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여는 일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한.중.일이 함께 노력해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공동노력을 통해서만 과거는 청산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에 새로운 비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의 21세기 프로젝트다.

동아시아에 정치적 패권주의를 극복하고 안보상 평화공동체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자유무역 확대 등을 통해 공동번영의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 일, 그리고 역사.종교.예술의 교류 등을 통해 문화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러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위해 한국이 앞장서 중국과 일본을 설득하고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 연대하고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앞장서야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동아시아 전체에 평화와 공동번영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전략을 위해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동아시아에 패권세력들이 등장, 서로 각축하면 한반도는 항상 희생물이 돼 왔다.

둘째, 세계화 시대의 국민국가의 발전전략의 하나가 '열린 지역주의' 의 강화다. 세계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같은 지역 내 국가간의 긴밀한 경제.통상.금융협력이 불가결하다. 개별국가보다는 지역연합이 국제사회에서 보다 강한 교섭력과 보다 높은 위기대처 능력을 가진다.

셋째, 우리의 남북문제 해결을 위해 동북아 공동체는 필수적이다. 우리의 통일 문제는 단순한 남북한간의 문제가 아니다. 동아시아의 군사적 평화공동체와 경제적 번영공동체의 구축이라는 보다 '큰 틀' 안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넷째, 동아시아에서 식민주의와 패권주의를 추구한 역사가 없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따라서 한국이 동아시아 공동체 구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도덕적 설득력이 강하다.

***한국 주도 공동체 구축을

전쟁과 갈등과 반목의 역사가 너무 깊어 과연 동아시아에서 공동체 구상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EU의 책임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내에서도 국가간, 민족간 갈등과 반목은 오늘의 동아시아에 못지 않았다. 아니 훨씬 더 심했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80년 동안 세번의 전쟁을 치렀고 양 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만 죽은 사람이 2천5백만명을 넘어섰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부 정치지도자들이 유럽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아무도 오늘날과 같은 성취가 가능하리라 꿈도 꾸지 못했다" 고 말했다. 그렇다. 역사는 결국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꿈꾸는 민족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朴世逸(서울대교수,法經濟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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