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홀] 임순례 감독의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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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영화계는 살벌한 곳이다.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속으론 제한된 관객을 놓고 벌이는 신경전이 대단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적자생존의 경쟁이 치열하다.

이런 영화판에서 임순례(41).박경희(36) 두 여성 감독의 우정이 화제다. 1994년 단편 '우중산책' 으로 제1회 서울 단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임감독은 이후 '세 친구' (96년)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2001년) 등을 통해 역량 있는 감독으로 떠오른 인물. 지난 5월 전주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던 '와이키키…' 의 일반 개봉(10월)을 기다리고 있다.

박경희 감독은 사실 감독으로 부르기엔 아직 이른 상황. 데뷔작 '미소' 를 지난 2월 찍을 계획이었으나 영화사 사정과 제작비 문제 등이 겹쳐 중도하차할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임감독이 팔을 벗고 나섰다. 후배인 박씨의 프로듀서를 자청한 것. 영화에서 프로듀서는 말 그대로 잔살림꾼. 배우 캐스팅부터 시작해 제작비 마련, 촬영 장소 물색, 제작 일정 관리 등을 도맡아 한다. 그만큼 '폼나는' 감독에서 '몸만 바쁜' 프로듀서로 '전업'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심이다.

물론 그들만의 각별한 인연이 있다. 박씨가 임감독의 '우중산책' 과 '세 친구' 의 조감독 출신이라 임감독이 이번에 '보은' 의 차원에서 프로듀서로 나선 것. 신세를 진 선배로서 곤경에 빠진 후배를 돕겠다는 뜻이다.

반면 임감독은 약간 다르게 설명했다.

"시나리오가 보기 드물게 좋아 프로듀서를 자청했어요. 단순한 친분 관계 때문은 아니죠. 좋은 작품이 사장돼 우리 영화의 다양성이 훼손되는 게 안타까웠을 뿐입니다. "

영화 '미소' 는 갈수록 시야가 좁아지며 결국 실명을 하는 특이한 질병에 걸린 30대 초반 여자 사진작가의 얘기. 전문적으론 망막색소 변성증이란 희귀병이다. 시나리오도 직접 쓴 박감독은 이 소재를 통해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자기의 시각만을 고집하는 현대인을 드러낼 생각이다.

임감독은 " '와이키키…' 이후 따로 준비하는 작품이 있었지만 잠시 미뤄뒀다. 제가 연출하지 않더라도 관객들이 좋은 영화를 본다면 즐거운 일 아닙니까" 라고 말했다.

지난 석 달간 임감독이 열심히 뛴 덕분에 '미소' 는 9월께 촬영에 들어간다. 두 감독은 "제작비 마련.영화사 섭외가 마무리 상태라 이번엔 틀림 없다" 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반드시 만들겠다" 고 다짐했다.

한국 영화사 80여년에 작품을 내놓은 여성 감독은 지금까지 고작 여덟명. 두 감독의 우정이 새삼 귀중한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도 한몫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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