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시조집 '풀빛 화두'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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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동자승 밝은 모습이/설법보다 높은 법문/비껴서 하늘을 보면/새 세상이 열려 오고//티없는 웃음 한 번에/일만 번뇌 다 거둔다" ( '동자승-조계사에서' 전문)

조계사 바로 앞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시조를 쓰고 있는 시인 이상범씨가 15번째 시조집 『풀빛 화두』(책만드는집.5천5백원)를 최근 펴냈다. 이번 시조집에서 이씨는 전국의 사찰을 돌아보며 얻고 깨달은 평범한 사람들의 불심(佛心)을 70편 평시조 단수의 절제되고 단아한 선율에 실었다.

"대웅전을 비우고서/부처님도 나들이 갔나/적막이 흐르는 마당/햇살만이 따가웠다//부처가 부처를 마중 갔나/쪽마루에 앉은 길손" 초파일 조계사 동자승들의 해맑은 웃음에서 어느 고승의 법문이나 경전에서 보다 많고 높은 걸 단박에 보아냈듯 위 시 '길손' 에서는 아마 부처님도 모셔놓지 못했을 듯한 가난한 암자에서 깨달음을 얻어내고 있다.

시인은 '부처가 부처를 마중 갔나' 라고 그 가난의 누추함을 단번에 뛰어넘으며 큰 여유를 찾고 있다.

"조금은 삐딱한 갓/부처님은 침묵이고/삼천 배가 바닥의 돌/돌을 갈아 거울 만든다//영험의 끝은 못 짚어도/매일 비춘 하늘빛" 학사모 같은 바위를 쓰고 있어 빌면 수험생들에게 영험이 있다는 선본사의 '갓바위 부처' 를 읊은 시조다. 부처님은 침묵하는데 바위가 닳도록 올린 어버이의 3천배 정성이 그 수험생에게 가 닿아 영험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는가고 시인은 묻고 있다.

"바다가 하늘 되고/하늘 또한 바다 되는/마음 먼 수평 위에/일고 지는 일만 파도//화두란 생각의 나루에/띄워 놓은 조각배" ( '禪.2-남국선원에서' ) 평생 토굴 속 면벽수행으로 깨우치는 도(道)는 크다. 그러나 어느날 수평선을 바라보며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워버리면서 문득 깨우치는 것 또한 우리 일상의 청량제가 아닌가.

평범한 우리 누구의 삶도 화두 하나씩 짊어진 수행이 아니겠느냐고 이씨는 불심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민족 전통의 전아한 형식인 시조에 담아 친근하면서도 품위있게 전하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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